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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13. 2021

반복은 권태로운가 (1)

소소하게 철학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배가 불러서 그래, 배가 불러서!"라며 신경질적으로 그 호소를 제압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여유라곤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시기심 섞인 독설이지만,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일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에게 권태는 사치인 것이다. 그들은 권태보다는 허무에 빠지곤 한다. 끝없는 그 노동의 의미를 묻게 되는 순간.


다르게 질문해보고 싶다. 반복은 정말 권태의 원인인가 혹은 반복이 허무감의 원인인가.


일상이 반복들로 이루어졌다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해가 뜨면 잠을 깨고 먹고 일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하루는 산 사람들의 반복적인 일상이다. 몸 져 누울 정도로 아프지 않은 한 세상없어도 7시에는 일어나 국물을 끓이고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부쳐 출근하는 사람 아침상을 차리는 게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일이다. 식구들을 내보내고 나면 똑같은 식기를 똑같은 수세미와 똑같은 세제로 똑같은 몸 근육을 써서 닦는다. 밤새 너저분해진 집 안을 치우고 간단하게 세수 양치를 하고 TV를 켜거나 커피를 들고 책상 앞에 앉거나... 이렇게 시작되는 아침을 매일 반복하지만 그때까지 권태가 파고들 자리는 없다. 설거지, 청소... 몸 쓰는 일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권태롭달 수는 없다.


반복 자체가 권태의 원인은 아니지 않을까. 권태는 차라리 움직임을 멈추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런 다음 오늘 아침을 머릿속으로 복기할 때, 비슷했던 어제 아침과 그제 아침을 상기하면서 시작된다. '똑같네. 오늘도 어제와 같고 내일도 같을 것이고...' 권태는 그렇게 온다. 그리고 이 반복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허무도 온다. 


만약 인간에게 돌아보는 시선이 없다면, 회고하고 성찰하는 기능이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기억이 없다면 권태와 허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나간 행위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뭉뚱그리고 피상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 시간은 흐르는데 설거지를 하는 나는 변함없다고 기억한다. 어제의 설거지와 오늘의 설거지가 똑같다면 그래서 권태로움과 함께라면 절대 수행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어렵고도 매혹적이었던 책 『차이와 반복』에서 나에게 남아있는 한 문장은 이것이다. '차이가 먼저다. 차이가 있기에 반복이 가능한 것이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그 문장의 의미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속속들이 알고 나면 매력은 떠나간다. 


골똘히 고민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문장을 대입해보곤 했다. '아,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할 때가 가끔씩 있다. 그리고 오늘 설거지를 하면서 그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설거지하는 이 행위가 '차이 나는 반복' 아닐까? 말은 똑같이 반복할 수 있어도 행위가 똑같이 반복될 수는 없다. 설거지를 한다는 행위는 매번 차이 나는 것이기에 권태감이 동반되지 않는다. 만약 설거지가 매번 동일한 것이라면 어떻게 수십 년 동안 하루 서너 번을 반복할 수 있겠나.


반복은 권태감의 원인이 아니다. 반복하는 것은 언제나 차이를 함축하고 있기에 반복될 수 있다. 권태감은 행위를 멈추고 회고하는 인간에게 온다. 그래서 쉼 없이 노동하는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라는 날 선 말에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권태를 느낄 여유는 없을지언정 허무감에는 무방비 상태일 것이다. 허무감은 언제나 일을 마친 후 어둠을 틈타 찾아오기에. 자신의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신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밤낮없이 일만 하는지. 돈은 벌어서 뭐 하는지...


자신을 의식하고, 기억하고, 성찰하는 생명체인 인간에게 권태와 허무는 삶의 동반자와 같다. 그것은 사유하는 동물에게 내려진 천형일지도 모르고, 반대로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로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권태와 허무를 느끼는 그 시간은 미쳐버릴 것 같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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