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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15. 2021

두 영화평론가

소소하게 철학적인

지금의 나로선 이렇게 생각한다.

평론이 예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평론가가 예술가일 수는 있다고. 물론 모든 평론가가 예술가는 아니다.


단식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만 단식 예술가는 있었다. 휘파람 부는 예술가, 연구하는 예술가, 곡예하는 예술가, 이들은 프란츠 카프카의 히로인들이다.


L과 O는 둘 다 평론가라 불린다. 그들이 다루는 소재는 영화다. 둘 다 일단의 팬덤을 갖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두 사람의 현격한 차이는 L이 소재 속으로 들어간다면 O는 소재를 이용한다. L의 태도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L은 영화 안에서 영화 자체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래서 L에 대해 누군가는 비판적 시각이 결여되었다고 말한다. O와 비교하면 정말 그렇게 보인다. O는 영화로 현실 정치도, 언론도, 사회도 비판한다. 나에게 O는 영화 평론 정치가이다. L은 영화 평론 예술가이다.


그렇다고 해서 O의 영화 평론은 예술이 절대 될 수 없고 L의 영화 평론은 언제나 예술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평론이 예술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은 내게 없다. 단지 내 취향에 더 맞거나 안 맞는 글이 있을 뿐이다. O의 글을 볼 때는 격하게 동의 되거나 동의 안 되거나로 확실하게 구분 된다. 어느 쪽에 손을 들든 반대쪽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그때의 내 마음은 전투적이다. 씩씩거린다. L의 글을 볼 때 오는 신호는 '음~ 그렇구나' 혹은 '음~ 그렇구나, 그래서?' L의 글에는 '모르는 것'과 '닿지 않는 것'이 있다고 느낀다. 판단 불가, 판단 보류.


정치적인 글은 동의가 될 땐 속 시원하고 동의가 안 될 땐 욕이 나온다. 나를 이 두 태도로 갈리게 만드는 글이 나에게는 정치적인 글이다. 동의하면서 나를 고수하고, 동의하지 않으면서 역시 나를 고수하게 되는 글이다. 비정치적인 글은 판단을 지연시키고, 나를 고수하려던 긴장감을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저게 무슨 뜻인 거지? 저런 문장은 어떤 차원에서 나오는 거지?'라며 학구열을  부추기는 글이다.


취향으로 따지자면 나는 L 쪽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치적이기보다 예술가적인 인간에게 더 호감을 느끼며, L을 영화평론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예술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기를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사람이다. L은 영화를 사랑하고 그런 그를 나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단식을 사랑하고, 휘파람을 사랑하고, 연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마저도 크게 개의치 않는 예술가들이었다.


O는 예술가되기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O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해서 영화평론가가 아닌 것도 아니고 영화를 시사문제에 빗대서 말한다고 그것은 평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O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평론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도 할 것이다. 


정치적 평론가에게는 이것과 함께 언제나 저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정치적 평론가가 된다. 다른 한편 예술적 평론가는 '이것' 외에는 다른 무엇도 눈에 안 들어온다. 그만큼 '이것'에 집중한다.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눈에는 사실상 비교할 대상이 없다. 


이것만 보는 사람은 저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것 너머'를 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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