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비유⟩66호에 게재된 단편소설
정지돈이 파리에 몇 달 체류했던 때가 언제인가 확인하려고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빼내왔습니다. 그 얘기로 시작되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50페이지쯤 가야 언급되네요. 해부하며 읽었다느니 어쩌니 그랬는데 다 착각의 착각의 착각이었습니다! 2021년에 나온 책에서 지난 가을이라 했으니 2020년. 그는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파리에 갔고 석 달간 머뭅니다. 그가 파리에 체류한 게 왜 이 글의 시작이 되어야 했을까, 왜 확인까지 하려고 했을까냐면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가 파리 북역 근처를 걷다가 만난 서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앗!
“2019년 가을 동안 나는 파리에 머물렀다. 문학 레지던스 프로그램 때문이었는데”라고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에 써 있네요...눈은 보는 기관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손에 든 돋보기처럼 내가 보려고 마음먹고 갖다 대야만 보이는 얼굴에 위쪽에 갖고 다니는 돋보기였습니다. 참내~. 아니면....! 이건 소설이니까. 2019년이든 2020년이든 난 왜 여기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걸까요.
파리...는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과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에서 그리고 2023년 작가정신에서 나온 연작소설집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에서 도입부에 사용되고 있는 모티프입니다.(책 제목이 진짜 깁니다. 국내에서 나온 소설 중 가장 긴 제목이라는 소문) 정지돈을 따라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지만, 소소한 발견이지요.(^^) 이건 내가 보기에 정지돈스러운 것입니다. 반복하나 차이를 내는 것. 내가 좋아하는 더욱 정지돈스러운 면모는 반복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대체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파리 갔다는 얘기를 사석에서 흩어질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정식 출판되는 글에서 세 번이나(제가 읽지 않은 책에 더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려먹는 것입니다. 정지돈식 유머이자 주류 문학에 대한 저항이라고(이런 단어를 정작가님은 싫어할 듯한데) 나는 생각하지요. 그의 언행과 그가 따라다니는(내가 그를 따라다니듯이) 작가들의 면면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젊은 작가상 수상 이후 그는 한 잡지 인터뷰에서 말합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중략)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후장사실주의 모임은 정지돈의 말에 의하면 해체했습니다. 작가 오한기, 이상우, 금정연과 박솔뫼가 그 안에 있었고, 문예지 한 호를 내고 말았는데, 그 뿌리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내장內臟사실주의’가 있습니다. 내장은 그냥 신체의 내장기관할 때 내장입니다. ‘밑바닥’과 ‘사실’을 중시한다는 걸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당대 주류였던 ‘초현실주의’의 반대항으로서 볼라뇨에 의해 수행된 문학적 실천이라는데요. 정지돈의 후장사실주의는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하고 볼라뇨의 문학적 태도랄까 사상이랄까에 동조한다는 표시를 한껏 했던 것이지요. 최근에 본 영상에 이사 간 그의 작업실이 나왔는데 로베르토 볼라뇨의 캐리커쳐 초상화가 한쪽에 서있었습니다.
무슨 논문도 아니고요? 비평도 아니고요? 르포도 아니고요? 순수문학이라고 하는 쪽에서 인용이 수두룩 빽빽인 소설을 본 적이 있나요?! 정지돈은 그런 걸 하고 있고 그러니 스스로를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거예요 어딜 가나 물어보니까요? 왜 남의 것을 그렇게 인용하는가, 그게 순수문학이 취할 태도인가? 정지돈의 답은 단순명료했습니다. 왜 안 되는데요? 그는 (모든) 문학이 세계의 인용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그다운 대답입니다. 문학은 창작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져다가 쓰는 것입니다. 아니 창작이란 이미 있는 것을 가져다 씀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죠. 어떤 면에서는 수긍이 갑니다. 정지돈은 다른 문학작품을 인용하는 자기 작품을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라 하고, 본인이 그걸 제일 잘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창작자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지요?! 창조랄지 상상력이라는 것이 무에서 유의 창조라는 오랜 통념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창작을 과거와 기억을 되살려내는 작업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당신들 없이 우리가 없다는 존중의 표현이기도 하고 그러나 당신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게 아니라 차이 나게 반복한다!는 것인데. 나는 정지돈의 글을 그런 문학적 실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지돈이 제일 소름끼쳐하는 게 있다면 이러한 무겁고 근엄한 당위를 말하는 것일 텐데. 딱 한마디로 말해봐라 하시면, 세계는 픽션이다. 이것이 정지돈의 세계관이자 문학관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아직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로는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책은 그것이 소설이든 산문집이든 사실 저에게는 요약 불가입니다.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에 대해 더 쓸 이야기도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의 내용이라기보다는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의 색다른 독서경험입니다. 이 작품을 내가 무슨 짓을 하면서 읽었는지, 소설을 푹 빠져서 읽는 게 아니라, 검색하고 동영상 보고.. 그런 읽기에 대해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를 따라가며 얘기해보겠습니다.(다음 회차에는 진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