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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un 18. 2024

4 정지돈 [나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 끝

정지돈식 쓰기의 계보

소설의 화자는 파리에 온 목적이랄 게 없지는 않았으나 목적을 수행하기보다는 산책을 하고 서점 투어를 하고 있습니다. 파리의 북쪽 후미진 곳에 자리한 서점 ‘After 8 Books’는 마침(?) 평범하지 않은 색깔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급진적인 책을 취급하는 이 서점은 수년간 유럽을 떠돌며 난민 구제활동을 하던 폴과 나흐메라는 예술가 커플이 주인이었지요. 주인들은 캐시 애커의 책 『Low: Good and Evil in the Work of Nayland Blake』를 추천합니다.

      

이 짧은 소설에 얼마나 많은 이름이 나오는지를 세어보는 일이 어떤 독자에게는 읽기를 포기하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전개 방식입니다.      


서점 주인인 폴과 나흐메 – 그들이 추천한 캐시 애커의 책 (Nayland Blake) - 박솔뫼 소설가 -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숨을 참던 나날』 (이창래 – 켄 키지 『Caverns』),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 랜스 올슨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고유명들은 거의 실재합니다. 전적으로 창작자의 몫이어야만 할 픽션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 실재하는 것들의 ‘연결’에 있을 겁니다. ‘랜스 올슨’의 인터뷰를 토대로 쓰였다고 선언하고 시작된 이 소설에서 랜스 올슨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저러저러한 작가들이 언급된 후 서두의 끝부분에 드디어 등장합니다.      


책 속의 책 같은 형식으로 랜스 올슨의 히스토리가 시작되고, 마치 본론처럼 ‘역사적 메타픽션(Historiographic Metafiction)’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냥 읽기를 계속해도 좋지만 작가가 제시하는 ‘역사적 메타픽션’이 뭔지를 찾아보면 더 재미있어집니다.     

    


역사적 메타픽션 :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등장인물이 작품 속 세계가 픽션이라고 인지하는 설정을 둔 작품 혹은 픽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 

메타픽션 한쪽 극단에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자체완결성’이 있는 작품이 있다면 반대쪽 극단에는 ‘포스트 모던, 안티로망, 어떤 척도도 거부하는’ 작품이 있다. 메타픽션은 그 둘 사이에 있다.      

랜스 올슨은 역사적 메타픽션(허구 전기) 작가로 유명하며 이에 대해 광범위한 역사연구를 수행했다. 아방팝, 포스트모더니즘, 사변적 소설, 실험적 글쓰기 활동을 했고, 저서로는 『니체의 키스』, 『Head in flame』 등이 있다.      



랜스 올슨의 작품은 찾아보니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없습니다. 역사적 메타픽션이라는 소설형식, 글쓰기 방식이 한국문학계(출판계)에서는 아마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일까요? 따라서 한국독자들도 맛볼 기회를 얻지 못했지요. 역사적 메타픽션이 저런 거라면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가 딱 그런 소설이었군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라는 실제 인물과 저자의 건축학적 관심의 접점이 발휘된 소설. 소설가이자 젊은작가상 심사위원이었던 정영문은 “사실들을 허구와 잘 조합해 지적 소설의 모범적인 전형을 잘 보여주었다”라고 평했답니다. 지금 이 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 도 정영문의 심사평에 들어맞는 소설로 보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건축이 아니라,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메타픽션이라는 쓰기 형식과 그 형식 안에 담긴 이념 혹은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면서 바로 그 역사적 메타픽션의 형식으로 쓰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구(李玖) 대신 랜스 올슨을 데려와서요.

     

랜스 올슨 집안의 운명은 천체 물리학자 토머스 골드(칼 세이건의 스승)의 심층 고온 생물권 가설 때문에 찢겼고요. 위스콘신대학에 다니던 올슨은 웨이터 쇼티에게 알프레드 되블린(1878-1957)의 『베를린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책에 대해서 듣습니다. 여긴 픽션일까요? (알프레드 되블린을 찾아보니^^, 나는 일단 알라딘 서점에서 책과 작가이름을 검색합니다. 없고요. 구글링 합니다) 알프레드 되블린은 우리가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저자들, 귄터 그라스, 베르톨트 브레히트, 발터 벤야민 등이 리스펙해 마지않는 작가였답니다. 벤야민은 심지어 『베를린 알렉산더 대왕』의 스타일이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보다 중요하다고 했다는데요. 도대체 얼마나 난해한 걸까요!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을 거치나 불만족한 랜스 올슨은 왕따가 됩니다. 왜 랜스 올슨이 우리에게 낯선지 알겠습니다. 그가 거부한 곳에 존 치버와 레이먼드 카버가 있었네요.      


“랜디(랜스 올슨의 애칭)는 혼자가 익숙했고 조금 외로웠지만 오만과 저주를 무기 삼아 시더래피즈의 헌책방을 홀로 오갔다.”     


여기서 꿍짝이 맞는 ‘데이비드 실즈’를 만납니다. 실즈의 책 한 권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데요. 정지돈이 얼마 전 김혜리의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에 나와서 이 책에 대해서 열광적으로(내가 본 그는 항상 그렇습니다) 떠들었습니다. 『고다르 X고다르』란 책과 함께. 유튜브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1부만 듣고 <조용한 생활> 2월호를 구매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뉴요커>의 두 전속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 VS 레나타 애들러의 수십 년간 이어진 대결을 자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정지돈이 재미있는 지점이 바로 이런 거예요. 글이 된 걸 말하는 건 일반적이어도 한 말을 글로 그것도 소설의 문장으로 쓰는 거는 좀 못 보던 일입니다. 뭐 정지돈 자신에게는 글이 먼저였는지 말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경계를 흐리는 태도는 그냥 정지돈 자신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데이비드 실즈의 강연이나 인터뷰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자동번역으로 나오는 자막으로 대충 그가 말하는 문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정지돈은 “콜라주의 전도사, 문학의 역병”이라고 표현했고, 한국독자들이 엄청 좋아하는 미국작가 『대성당』을 쓴 레이먼드 카버를 무려 “터무니없이 감상적”이라고 평가한 (뭘 모르는^^) 작가입니다.

     

어쨌든 정지돈은 데이비드 실즈의 『현실 갈망 Reality Hunger(2010)』과 그리고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가 인용한 랜스 올슨의 말을 재인용해서 소설에 씁니다. 거의 A4 한 장쯤 분량입니다. 인용은 본론 두 번째 장에서 “3. 미국에 아방가르드는 없지만 언더그라운드는 있다(There’s no avant-garde in America, but there is an underground)”의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아방가르드(Avant-grade) 


“제1차 세계 대전 무렵부터 프랑스 등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 기성의 예술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함. 입체파·미래파·추상화파·초현실파 등의 총칭. 전위파(前衛派). / 예술 세계에서 첨단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 전위.  (출처: Oxford Languages)”. 


인용글에서 랜스 올슨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예술가는 영화감독 노아 바움백, 작가 로날드 수캐닉(1932-2004), 레이먼드 패더만(1957~ ) 그리고 조너선 프랜즌과 무라카미 하루키까지입니다. 엘리트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백인남성 작가들과 아방가르드를 연결했지만 올슨이 보기에 그들은 그저 온갖 고뇌를 짊어진 듯한 예술가적 이미지뒤에 숨고, 여성혐오와 가부장제와 가족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에 있다는 ‘언더그라운드’는 뭘까요? 랜스 올슨은 로날드 수캐닉을 다시 소환합니다. 그가 옳게 본 것이 있다, 언더그라운드는 ‘양질의 문학(Quality lit)’에 저항한다, 그들의 계보에는 로렌스 스턴과 라블레가 있고, 더 올라가면 소피스트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없다,라고 한 점.      


“(소피스트 이소크라테스의) <판아테나이>의 핵심 문장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나 자신을 알라’와 비교하면 그 의미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죠. 여담으로 충만한 <판아테나이>는 시종일관 길을 잃고 산만하고 어수선하고 때때로 시시껄렁하지만 통렬하고 해방적이고 진솔하며 무엇보다 끝나질 않습니다. 저질 문학적 흐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들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어디에서나 틈을 찾아 모습을 드러내고 싹을 틔웁니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신자유주의 내부에서, 민주주의 내부에서, 공산주의 내부에서, 구조주의 내부에서, 페미니즘 내부에서, 퀴어이론 내부에서,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내부에서 배제당하는 것들을 구제합니다. ······ 저질 문학은 일종의 안티테제, 반문화일까요. 지금 저는 지긋지긋한 이분법을 반복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저질 문학은 반대항이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반대의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양질의 문학, 우리가 주도적으로 경험하는 문화가 반대 반대항이라고요. 저질 문학이 자연의 질서고 우주의 근본 원리며 여기에 저항해서 인간들이 세운 폭력적인 체계가 바로 지금의 문화인 것이죠. 아방가르드가 의미 그대로 문화의 미래, 앞, 선봉을 뜻한다면 저질 문학은 저 아래, 밑, 내부를 뜻합니다. 부디 제 얘기를 내면 또는 원시로 돌아가자는 식으로, 이반 일리치의 아류나 프로이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데이비드 실즈가 인용한 랜스 올슨의 문장을 정지돈이 재인용했고 내가 이 글에서 다시 인용했습니다.^^ 깁니다. 길어도 너무 좋습니다. 언더그라운드를 저질 문학이라 번역했네요. “저 아래, 밑, 내부”를 뜻한다는 저질 문학은 정지돈이 한 때 만든 ‘후장 사실주의’를 다시 떠오르게 하고, ‘후장 사실주의’ 아이디어를 준 로베르토 볼라뇨의 ‘내장 사실주의’로 이어집니다.

      

소설의 화자는 자기가 쓴 글을 봐달라고 랜스 올슨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답신은 “문학은 거의 끝물이지만 남은 단물이라도 빨고 싶으면 크노프나 랜덤하우스(대형출판사) 같은 곳에 투고하라”였습니다. 그리고 혹시 너무 억울하다면? 보라며 유튜브 링크를 보냅니다. 데이비드 실즈의 신작 영화였습니다. 

     

다시 데이비드 실즈로 돌아왔네요. 실즈와 올슨은 “단짝이자 라이벌”이었답니다.


소설의 후반부는 데이비드 실즈의 에세이 필름 <린치: 역사 Lynch: A History>에 대한 것입니다. 미식축구의 전설적인 플레이어 마숀 린치에 대한 이 작품은 “84분이며 700여 개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숏은 인용된 것이며 영화에는 내레이션도 자막도 없다. 제작 기간은 사 년이며 다섯 시간짜리 버전과 이십 시간짜리 버전도 있다”로 소개됩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왜 감독 실즈에게 욕을 퍼붓고 상영 도중 나갔는지 이해할만합니다. 상영회가 끝나고 실즈는 “대체 이 영화로 말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실즈의 대답은 “이 영화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나는데요.

     

영화 <린치: 역사>를 보면 모든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마숀 린치의 대답은 한결같이 “I’m thanksful”이던데요. ㅎ  

   

이 소설은 “랜스 올슨(1954~2024?)의 삶과 인터뷰를 토대로” 쓰였으나, 데이비드 실즈(1956~ )로 이어집니다. 정말 안 끝납니다. 

     

“저질 문학적 흐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들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랜스 올슨 & 데이비드 실즈(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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