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분할선을 구부리는 방식 하나
요즘 세미나에서 읽는 책은 <식인의 형이상학>입니다. 세 명이서 매주 목요일 2시간 정도 ZOOM으로 만납니다. 미리 정해진 분량을 읽고..., 세미나 시간에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수 년 해오던 짓인데 쓰려고 하니 갑자기 골똘해지네요. 어떤 책으로 하는가, 누구와 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거의 책의 가독성에 좌우되긴 하는데요. 우리 팀이 읽는 책은 보통은 좀 어렵습니다. 어렵다의 의미도 여러 가지지만 이번 책의 경우 한 문장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독성이 좋지 않습니다. 개념어로 도배된 문장들이라 그래요.
개념어는 사전事典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하는 단어 같은 겁니다. 새로운 용어이지요. 단어의 생김새가 새롭기보다는 새로운 용법과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어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개념이 포괄하는 공감각적 경계를 파악하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런 책은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책을 읽는 관건이 됩니다. <식인의 형이상학>은 조금 다릅니다. 개념어로 도배된 문장들이라 했는데 기존의 개념어를 많이 알수록 읽기 유리한 책입니다. 더불어 이 책은 기존의 개념을 거꾸로 적용하기 때문에 맥락을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기존에 알던 방식으로 자칫 넘어가서 오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미나에서 하는 일은 책을 잘 읽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쓰고 보니 좀 어이가 없네요.(^^) 책을 잘 이해했는지 서로 확인해 주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고 대답 가능한 사람이 설명해 주고 다들 모르겠다면 그 단락을 같이 읽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세미나는 같이 공부하는 장이네요.
우리 세미나가 명확한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한이 없지는 않은데 종종 읽은 부분을 다시 읽기도 합니다. 이번 책은 1부만 세 차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1부의 1장을 필사를 해가며 읽었습니다. 진도를 나가다가 방향을 잃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와 서문을 읽습니다. 어려운 책은 그럴 때 좀 도움이 됩니다. 처음에 읽는 서문보다 중간에 다시 돌아와 읽는 서문은 그 느낌이 다릅니다. 내용을 조금 맛본 후라 책의 전체 방향이 눈에 더 잘 들어오지요. 어려운 책(^^)을 읽는 분들은 한번 해보세요.
<식인의 형이상학>의 저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뚜르(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신 인류학자입니다. 브라질 사람, 인류학자.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인류학은 그들이 정복한 땅과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제국주의적 학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정복지 원주민을 관찰하면서 저들은 우리와 뭐가 비슷하네, 뭐는 다르네 하며 자신들을 돌아봤습니다. 원주민을 보며 때로는 자신들이 그들처럼 야만적이 아니라서 안도했고,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순수함을 상상하는 향수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브라질 출신의 이 인류학자는 인류학의 유럽적 버전을 전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유럽적 나르시시즘에 반하는 안티-나르시시즘이 아닙니다.
야만이라는 규정은 문명이라는 척도를 사용할 때만 가능한 규정입니다. 그래서 유럽적 인류학에 반대하는 인류학은 가령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다!라고 반항, 그렇습니다, 반항의 방식이었습니다. 반항이란 언제나 척도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척도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러나 이미 주어지고 공고한 세계를 무너뜨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지라 혁명의 성공이 어렵듯이 언제나 아우성치다 끝나고 마는 꼴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갈 수밖에 없는 인류학 체계 속에서 저자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 합니다. 여기의 척도를 일단 인정하면 어떤 걸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야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다시 그려봅니다. 식인의 형이상학.
유럽적 인류학은 기호와 세계, 인격과 사물, 우리와 그들, 인간과 비인간을 통일-분리하는 경계를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분할선을 다시 긋자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분할선을 분할선인가 아닌가 구별이 어렵게 만드는 방법을 채택합니다. 분할선을 구부립니다, 방향도 자유롭게 마구 구부립니다. 가다가 어떤 구역에서는 시간을 좀 끌면서 그 부분을 더 파이게 합니다. 분할선만큼은 아니겠지만 좀 깊고 진해지겠지요. 선이 구부러지고 굴곡이 많으면 많을수록 분할선은 효과적으로 희미해집니다.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면 수긍이 갑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들뢰즈-과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어딘가로부터 탈주하는 방법은 이런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혁명은 언제나 실패일 수밖에 없음을 혁명은 각자의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은 끝이 나지 않는 과정임을 말합니다. <식인의 형이상학>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저자는 분할선을 어떻게 구부리고 흐릴지 계속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