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서울 국제 도서전
교실 책상 같은 작은 테이블을 나란히 붙여놓고 안쪽에 앉아들 있습니다.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시선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조금씩 돌리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누가 다가오는지 온몸이 촉수가 되어 감지하고 있는 등판에서 독립출판작가들의 긴장이 느껴집니다. 익숙하고 반가운 표지가 눈에 띄어 한 테이블 앞에 멈췄습니다. 초록이 짙고 잎이 무성한 가로수 사진으로 채워졌던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의 표지를 연상케 하는 작은 책이었습니다. 『하는 사람의 관점』이라는 제목을 가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에세이집입니다. 딸은 엄마다운 제목이네 합니다. 엄마가 고를 법한 책이란 의미겠지요. 저 머릿속에 든 엄마의 정체성은 뭘까 궁금합니다.
뽀얀 얼굴에 차분히 빗어 내린 긴 머리, 발을 모으고 가만히 앉아 있던 여자는 내가 테이블 위의 책을 한 권씩 집어 들어 넘기자 조용히 일어납니다. 뭔가 설명을 해주는데 들리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는 사람의 마음』을 펼쳐 몇 줄 읽어봅니다. ‘뒷담화와 글쓰기’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편안하게 잘 읽히는 문장들입니다. 책 넘어 여자의 눈과 잠깐 마주쳤고 허나 책에 눈길을 둔 채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을 바로 앞에서 보는 기분은 어떤 건가요? 여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집니다.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냐고... 내가 말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자였습니다. 『하는 사람의 관점』을 샀습니다. 표지 안쪽에 저자 사인도 받았습니다. 결제를 하는데 “독립출판수기는 아니에요”라고 저자가 말합니다. 내가 독립출판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아니면 본인이 처음엔 그렇게 쓰려했으나 중간에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강민선 작가는 ‘임시제본소’라는 1인 출판사를 열어 자신의 책만을 출판해 왔습니다. 책 뒤 필모그래프를 보니 2017년에 처음 『백 쪽 : 백 쪽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후 꽤 부지런히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서 2022년에 나온 『하는 사람의 관점』까지 치면 18권이나 됩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첫날의 아침 테이프를 끊어주마 하고 왔는데 들어온 지 2시간 만에 몸과 마음의 한도가 초과되고 맙니다.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턱턱 치며 조금 더 힘을 내보았습니다. 눈길을 끄는 테이블 위에는 ‘수학정석’의 표지를 패러디한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처음 보는 건 아니고, 과거 독립출판축제에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동안 쓴 작품 전체를 가지고 나와 좌판(?)을 벌이는 일도 독립 출판 작가의 업무 중 하나입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작가는 핸드폰을 보면서 “편하게 펼쳐보세요”를 기계처럼 반복합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갈굼의 미학』을 골랐습니다. ‘책’이라고 할 때 연상되는 면의 보편적인 배열을 따르지 않은 책입니다. 한 줄만 쓴 페이지도 있고, 그 한 줄을 맨 아래 쓰고 위쪽은 비워둔 페이지도 있습니다. 내용은 시니컬하고 블랙 유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독립출판페스티벌 같은 곳에서 처음 그런 책들을 봤을 때는 참 난감하였지요.
전업작가인가요? 물었습니다. 핸드폰만 주시하던 작가가 손사래를 칩니다. 이것으로는 먹고살지 못합니다,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자꾸 기대를 하게 됩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인생. 전 세계를 망라해도 그런 작가는 많지 않을 겁니다. 우리나라엔 김영하 작가 정도만 가능하다는 암울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 좋고 발 빠른 젊은 작가들은 그런 기대는 애저녁에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먹고사는 일은 그것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글쓰기는 그것대로 하면서 사는 겁니다.
오늘 하고 싶었던 얘기는 또 꺼내지도 못하고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두 작가와 작품 얘기만 했네요. 독립출판작가의 자기 고백적 글쓰기와 등단작가의 자기 고백적 글쓰기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지난주에 불거진 정지돈 작가 사태를 지켜보는 중입니다. 잠을 설쳐 머리가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