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이름을 보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숭례문학당의 ‘함께읽기’ 프로그램에 올라온 책 [2666]을 보는 순간, 아니! 누가? 진행자가 궁금했고 그러나 누구였대도 우리 관심의 추파가 어디쯤에선가 교차했음으로 무조건 반가웠고 주저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다. [2666]은 어떤 책인가. 912페이지라니! 보나마나 읽기는 녹록치 않을 테고 가장 큰 이유는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에 분명 매달릴 나 때문일 것이다. 자명할 또 하나의 실패가 있다. 요약에 실패할 것이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따른다면 실패는 아니고 다만 경험이 혹독할 뿐이리라.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다. [칠레의 밤]과 역시 1천 페이지가 넘는 [야만스런 탐정들]이다. 물론 읽지 않았다. 그러니까 볼라뇨는 나의 맹목과 허영을 입증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 쓰고 싶은 것은 허영이 아니라 나의 맹목에 대해서다. 허영을 얘기하면 슬퍼질 것이고 맹목은 나의 쾌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지돈 작가의 글에서 로베르토 볼라뇨란 이름을 처음 보았다. 정지돈은 작품에 실존 인물들을 아주 자주 출연시킨다. 한 때 그는 다수의 평자들에게 ‘도서관 작가’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는데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문학동네 제6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고 나서는 좀 달라졌을까. 실존했던 과거의 인물을 지금 여기로 불러와 상상적 관계들을 만들어가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통상적인 소설의 문법을 비켜간다. 그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대해 내가 애정해마지 않는 북튜버, 편집자 K는 이렇게 리뷰했다. “하나의 주제 아래 긴 호흡으로 쓰인 산문. 아직 국내에는 드문 책. 목가적인 글 아님”. 나는 그 책을 각 잡고 씹어 먹을 듯 읽어야 했다.
다시 돌아가자. 볼라뇨는 정지돈의 책 속, 많은 실존 인물들 중 하나였고, 정지돈이 공공연하게 애정을 밝힌 작가들 중 하나였다. 볼라뇨 뿐만 아니라 정지돈이 글에서 언급한 모든 작가들을 나는 기억한다, 잊고 싶지 않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학창시절 몸이 근질거렸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영화 [연인]의 원작자다. 정지돈 때문에 그의 유명하지 않은 소설을 한 권 읽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대한 인상은 아직 그대로다. 흥미는 아직 남아있다. 지난 2, 3년 간 내가 읽은 산문집 중 베스트로 꼽는 [언다잉]의 앤 보이어와 [살림비용]을 쓴 데버라 리비가 뒤라스를 언급했기 때문이다.(이런 맹목라니!)
볼라뇨로 다시, 정지돈은 몇몇 자리에서 볼라뇨 타령(^^)을 했다(그럴 때만 내 눈에 띈 건지도). 그는 볼라뇨를 좋아하고 패러디했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나오는 몇 명의 작가 친구들, 이 정지돈 무리가 서로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 연유에 작가 볼라뇨가 끼어있다. 그들이 만들었던 ‘후장사실주의’의 뿌리에 대한 기록을 볼라뇨의 소설 [야만스런 탐정들] 첫 페이지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아주 신이 났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11월2일, 내장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11월3일, 내장 사실주의가 뭔지 잘 모르겠다.”
20대의 로베르토 볼라뇨는 기성 문단을 공격하고 기성 질서를 파괴하길 서슴지 않았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패러디해 내장(內臟)사실주의(밑바닥 사실주의)를 결성했는데, 정지돈과 그 일당은 다시 로베르토 볼라뇨의 말을 패러디해 ‘후장사실주의’를 만들었다. 2015년 당시 씨네21 인터뷰 때 정지돈은 이렇게 밝힌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중략)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자못 비장하다. 독립문예지 <analrealismo>1호 발간을 끝으로 활동은 접었는데 그들 일당의 삐딱 정신(!)은 여전하다.
공공연하게 매스컴을 타지는 않았던 2023년 볼라뇨 20주기 축제 때, 북토크에서 정지돈은 ‘볼라뇨는 문학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망각 속으로 나가떨어진 작가들의 이름을 그러~~케나 나열한다고, 그게 볼라뇨를 읽어보려던 독자들을 나가떨어지게 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의 [건축이냐 혁명이냐]가,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이 딱 그랬다, 나는 나가떨어질 뻔하였다. 정지돈은 문학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ㅎ) 나는 볼라뇨에 대해서 할,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다. 보르헤스 이후 스페인어 문학계 최고의 작가라는 볼라뇨지만 나에게는 가면 쓴 정지돈일 뿐이다. 그러나 곧 볼라뇨를 직접 읽게 된다는 것! 정말이지 나가떨어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