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Jul 30. 2024

8 재현과 재현의 윤리는 층위가 다르다

정지돈 [뉴 브레이브 휴먼] 사태

정지돈 작가의 <브레이브 뉴 휴먼>이 문제시된 지 한 달이 넘어가며 언론 상에서 논란은 수그러드는 듯 보인다. 실은 논란이랄 것도 없었다. 여느 뉴스처럼 잠시 반짝 웅성거리다 사라지는 중이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했던 당사자와 그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소수는 분통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소설을 통해 아우팅을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은 논쟁의 장을 인스타그램에서 X(트위터)로 옮기고, SNS상에 올라오는 담론들을 구글에 아카이빙 했었다. 논쟁을 확대하기에는 X가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와 작가가 맞대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를 주장하는 목소리들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전락하는 듯 보였다.      


지난 7월 21일 당사자의 블로그에 새 ‘입장문’이 올라왔다. 정지돈 작가를 더 이상 공적으로 호명하지 않고 그동안 아카이빙한 콘텐츠들을 ‘자료화’하는 웹사이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비슷한 사례들의 자료 창구 역할을 하는 웹사이트가 되리라는 것이다. 피해 주장 당사자에게 동의 여부를 떠나 논쟁을 무화시키지 않고 가늘고 길게 끌고 나가려는 그의 행보를 나 역시 길게 주목하고 싶다.  

              

와중에 정지돈 작가와 출판사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왜 반응하지 않는 것일까. 피해 주장 당사자는 정지돈을 “본인도 설명하지 못하는 ‘층위’와 ‘맥락’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작가”라고 했다. 숨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작가가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이 사태를 무마하기 위한 대응을 작가가 한다면 그동안 그가 여러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고 그가 써 온 작품에 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피해 주장 당사자가 옮긴 작가의 말처럼 양측의 주장이 딛고 서 있는 ‘층위’와 ‘맥락’은 다르기 때문이다. 양측은 소통될 수 없다.


두 주장을 압축해 보면 피해 주장 당사자는 ‘재현의 윤리’를 따지는 중이고 작가는 ‘재현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재현하지 않았는데, 상대 쪽에서는 재현을 ‘잘못했다’고 추궁한다. 작가가 사과를 한다면 자신이 재현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되므로 작가는 사과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읽혔다면 미안하다’는 말 이상은 불가능하다. 

          

정지돈은 지난 2020년 여름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왜 실존인물의 이름을 소설에 갖다 쓰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많은 작가가 실제 일을 적으면서 가명을 쓰고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말해요. 이 경우 층위가 하나밖에 안 생기죠. 이걸 뒤집어서 실재 인물을 두고 지어낸 이야기 혹은 있었던 이야기를 쓸 때 상상할 수 있는 게 더 다양하고 재밌어져요.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이는 거죠. 예를 들어 건축가 김원 선생님과 제 소설 속 김원은 기표(이름과 직업)만 같을 뿐 다 지어낸 얘기예요. 물론 때때로 실재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도 써요. 다만 그럴 때는 ‘글을 읽는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충족해 주기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기표(이름과 직업)만 같을 뿐 다 지어낸 얘기”라는 말을 이번에도 피해 주장 당사자가 들었던 얘기다. 그래서 피해 주장 당사자는

      

 "소설을 읽으며 고통스러웠던 건, 에이치(여성 캐릭터)는 분명 나인데, 나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며 "고민 끝에 친구에게 이 일을 논의하니 '나도 읽으며 바로 너라는 걸 알았고, 네가 허락한 줄 알았다'며 '그런데 결국 창작의 권리랑 충돌해 법적으로 따지기 어렵다'는 얘길 들었다"(한국경제 기사 재인용)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성은 결국 소설 속 인물이 자신을 재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작가와 출판사에게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만약 여성이 이 사태를 계속 윤리의 문제로 끌고 간다면 즉 여론몰이나 법정으로 가지고 간다면 현실적으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현의 윤리는 법적이거나 사회적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지돈에게 재현은 철학의 문제이다. 

     

작가의 철학은 사적일 수 있지만 책은 공적인 사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재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숙고하도록 독자들을 납득시키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역할은 설명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명 책임이 없다면 문학 자체로 계속 얘기할 수 있는 창구가 막혀서는 안 된다. 거기가 바로 작가의 존재 이유가 정당화될 수 있는 공간이므로. 

이전 07화 7 볼라뇨 O 정지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