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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1. 2021

'샤를의 모자'
: 문학가와 비평가(1)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그의 모자는 검은 털가죽 모자와 창기병 모자, 중절모, 나이트캡, 수달모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는 합성된 모자 중 하나였다. 백치의 얼굴처럼 아둔하고 보기 흉하면서도 표현력이 매우 풍부한, 애처로운 물건이었다. 고래 뼈를 바깥쪽으로 벌어지게 만든 타원형체로서 그 모자는 세 개의 털실 방울이 달려 있고, 이어서 마름모꼴의 벨벳과 토끼털은 붉은 띠로 나눠진 채 번갈아 붙어 있었다. 그다음에 자루 같은 것이 있었고 그 끝의 다각형의 판지 위에 복잡하게 꼬인 끈이 얹혀 있었다. 여기서 너무나 가늘고 긴 끈의 끝에 작은 금실 한 다발이 술처럼 늘어졌다. 그것은 앞 챙이 반짝거리는 새 모자였다.(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중에서)


이것은 극심한 말의 과잉입니다.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샤를의 모자를 눈앞에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세부 묘사를 합쳐서 전체를 그려보려고 애써봐야 상상력을 좌절시키지요. 이 모자는 문학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오로지 언어의 산물이지요. 거리에서 그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터무니없이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 자체를 해체합니다. 작가는 자세히 말할수록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많은 정보를 제공할수록, 독자에게서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선명함이나 명확함이 아니라 흐릿함과 모호함이지요.(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내 차례는 그러면 네 번째가 되겠다. 문학작품을 쓴 플로베르, 작품 해설을 쓴 테리 이글턴, 두 글을 읽고 덧붙인 동료의 글. 그리고 이 세 개의 글에 이어 뭔가를 쓰고 싶어진 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글쓰기를 촉발하는 힘은 말할 필요도 없이 원저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원저를 쓰도록 플로베르를 촉발한 것은 무엇일까? 문학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알 수도, 쓸 수도 없으니 그 의문은 덮어두자. 우리는 문학가가 보고 '글로 남긴 것'에 대해서는 나눌 것이 있다.


원저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샤를의 모자’를 저토록 상세하게 묘사한 글에 대해 그러니까 할 말이 있었던 거다. 추측건대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저 구절을 읽는 독자라면 대부분 같은 내적 경험을 하리라고 감히 단언한다. ‘말의 과잉’, 딱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저렇게 멋있는 단어의 조합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참, 지겹게도 말이 많네.’ 그랬다.


저토록 과잉된 묘사가 (대상을) ‘해체’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해석은 테리 이글턴의 것이다. 해석은 경험이 아니라 사유의 영역이고, 비평가는 다수의 동일한 경험에 대해서 (‘해체’라고) ‘명명하는 자’다. 흐릿함과 모호함 으로 경험된 것은 사유를 거치고 이름을 얻어야만 그 모호함을 벗어난다. 두 가지 길이 있다. 이름 붙이는 작업을 직접 하거나, 그가 붙인 이름을 이해하거나. 두 길 모두 쉬운 길은 아니다. 전제를 기억하지, 모호함과 흐릿함이 못 견디게 답답한 사람에게 열린 길이다.


보바리 부인을 읽을 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 율리시스를 읽을 때, 돈키호테를 읽을 때(지루했던 책을 생각나는 대로 읊어보았다) 나는 수없이 한숨을 쉬었다. 지리함을 견디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고 속으로 수없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를 외쳤다. 이 모든 악조건을 기어코 넘어보리라 다짐하며, 흰 종이와 연필을 가져와서 저 '샤를의 모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보았다. 결과는 이글턴 말마따나 역시 실패.


집의 위치, 풍경 하나 묘사하는 걸로 수십 페이지를 썼던 문학작품들, 고전이라고 하여 읽기를 시도했던 작품들은 모두, 분명, 저랬다, 기억이 생생하다. 시도했던 그림은 언제나 내가 아는 모자는 아니었고, 모자라고도 할 수 없었고, 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아주 금방 판정이 났다, 그린다는 게 불가능한 것으로. 글이 묘사한 대로 그린다고 그리는데 방향감각을 잃고 몇 스텝만 가도 그 대상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을 설정할 수가 없어 연필을 놓게 된다.


온라인에서 그림 구경을 종종 한다. 마침 며칠 전에 넘겨보던 추상화들이 떠오른다. '뭘까, 이건 뭘 그린 걸까...' 답답한데도 뭘 그린 건지 모르는 그림들을 그럼에도 자주 보게 되는 건 그 답답함이, 명확한 그림에서 오는 어떤 종류의 불편함보다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선명하고 명확한 것은 깔끔하고 뒤끝이 없다. 속 시원하다. 돌아설 때 주저할 필요가 없다. 변함없이 거기 있을 것 같은 것, 내가 보든지 안 보든지, 나의 냉정과 무심함에 상처받지 않을 도리어 비웃을 것 같은 그림들. 돌아서도 찜찜하지 않은데 바로 그것 때문에 아쉽다.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찜찜함이 없어서 도리어 아쉽다.


다시 안 봐도 괜찮은 글들도 그렇다. 명쾌한 글, 우리가 받는 보편적인 교육과 그 정도의 사유와 감수성만으로 충분히 독해할 수 있는 글은 다시 보게 되지 않는다. 다시 보는 사람이 없다면 말할 것도 없이 책의 수명은 빠르게 단축된다. 이승에서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저승에서도 살지 못하고 소멸하는 영혼처럼...(영화 ⟪코코⟫ 생각) 문학의 흐릿함과 모호함은 고전으로 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한 번 독서만으로 끝나는 고전은 없다. 설령 끝낸다 해도 읽었다는 느낌 외에 ‘언젠가는... 한 번 더’를 남기고야 만다. 한번 읽고 냉정하게 돌아설 수 없는 책. 모호함과 흐릿함이 그 책들을 자꾸 되돌아오게 만든다. 이 동일한 반복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내가 느끼는 모호함에 이름을 붙여줘야 할 것이다.


테리 이글턴의 ‘말의 과잉’이니 ‘해체’니 하는 언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 경험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뭉게뭉게 그 모호함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끝나곤 했었다.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다르게 볼 수 있는 재능이랄지 관점이랄지가 없다고 실망하고는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비평가는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심리적 경험에 이름표를 달아주는 작업을 한다. 리뷰와 비평을 좋아하는데 왜 좋은지 이 역시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무엇을 느껴야 할지 무엇을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태를 얼마나 많이 그냥 지나쳐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냥 지나쳐버린 것들은 또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동일한 모호한 경험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이름 붙여진 것들은 다시는 동일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아마 다시는 저 상세하고도 지루한 묘사에 의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지루함을 안 느낄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사물을 관찰하듯 문장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그 지리함을 참지 않고 훌쩍 넘어가서 이번에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다른 보석 조각을 찾겠다고 가벼운 마음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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