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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3. 2021

'샤를의 모자' : 문학가와 비평가(2)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말의 과잉이 대상을 해체할까, 아니면 대상을 해체하는 어떤 말의 과잉이 있는 걸까? 

선문답이나 시처럼 말을 가장 함축적이고 단순화한 텍스트를 대할 때도 우리는 해체되는 경험을 한다. 철학책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 그때의 심적 상태에 대해 이제 나는 이름을 얻었으므로 '해체'라 쓰지만 당시에는 그냥 몰랐고 판단 불가였다. 


말의 과잉은 그러니까 해체를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말의 '극도의 축약' 역시 하나의 방식이다. 이 방식들을 문학가는 사용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의 해체 경험은 독자가 자신의 경계를 확인하는 동시에 경계 밖을 마주했다는 의미일 거다. 각자의 의식과 관념들로 이루어진 경계. 각자의 경계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수준에서 해체를 경험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읽어도 항상 비슷하고 이해하는 데 무리 없는 책이라면 해체는 경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해체는 좋은 것인가? 해체되는 게 좋은가?

샤를의 모자를 머릿속에서 그릴 수 없는 게 좋은 경험인가? 모자에 대한 관념을 깨서 뭐할까? 그런데... 모자에 대한 관념 하나도 깨는 게 이렇게 어렵다. 모자에 대한 관념이 뭐가 어떻다는 건데 하는 순간 우리는 그 관념을 자연스럽게 지나쳐버린다. 무관심이기도 하고 중요한 건 따로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한데... 


판단 불가의 상태는 견디기가 힘들다. 그러면 샤를의 모자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해보자. 어떤 모자인지 판단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판단은 나의 것인가? 모자에 대한 관념은 나의 것인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모자에 대한 통상의 관념을 꼭 따라야 할까? 모자에 대한 관념 정도야 따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이루는 관념 덩이가 대개 그런 식이다. 의식되지도 않고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다. 그런 관념들로 우리가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 하나씩의 관념 덩어리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 덩어리에 속하지 않는 것을 만날 때 언제나 해체되는 경험을 한다. 어떤 사태에 대해 의심, 호기심, 적대, 호의 정도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이다. 판단'하는' 것 같지만 이미 판단'되어' 있는 것이다. 


적대감을 자기와 다른 것 때문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적대감과 해체감은 다르다. 적대감은 자기라는 경계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적대적인 것은 이미 자신이 지각하고 인식하고 있는 것들 안에 있다. 해체는 모든 감정과 모든 사유의 중지 상태다. 판단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판단 불가능의 상태가 되는 것.


나의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판단 중지라는 사태를 겪는다. 자신의 밖을 경험할 때, 그럼에도 판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리 존재하던 관념들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판단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고,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된다. 


질문이 계속 생긴다.... 판단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해체된 상태 그대로 놔두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이상하게 느낀 것이라도 자주 눈에 띄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사실 그렇게 우리는 이상함을 그냥 지나치면서 문제 삼지 않고 살아간다.) 비평가는 이상한 것을 자꾸 느끼는 사람이거나 이상함을 탐닉하는 사람인데, 자꾸 느낀다면 무엇으로라도 그 이상함에 대해 명명하고 싶은 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극이 지속된다고 할 때, 판단 중지의 상태는 견디기 어렵다. 그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비평가일 것이다. 


문학비평가는 말을 빚는다.

태초에 판단 불가의 세계가 있었다. 비평가의 명명 행위로 모호했던 것들이 존재를 입게 된다. 존재의 시작은 필멸로 향하는 길에 서게 되므로, 비평가에 의해서 빚어진 언어 역시 시간이 흐르면 닳고 달을 것이다. 그리고 달아빠진 언어는 사용자를 자연스럽게 구속한다. 우리로 하여금 샤를의 모자에 대한 플로베르의 묘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비평가적 작업을 했던 누군가가 만들어낸 모자의 관념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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