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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7. 2021

'샤를의 모자'로 세 번째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그의 모자는 검은 털가죽 모자와 창기병 모자, 중절모, 나이트 캡, 수달모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는 합성된 모자 중 하나였다. 백치의 얼굴처럼 아둔하고 보기 흉하면서도 표현력이 매우 풍부한, 애처로운 물건이었다. 고래 뼈를 바깥쪽으로 벌어지게 만든 타원형체로서 그 모자는 세 개의 털실 방울이 달려 있고, 이어서 마름모꼴의 벨벳과 토끼털은 붉은 띠로 나눠진 채 번갈아 붙어 있었다. 그다음에 자루 같은 것이 있었고 그 끝의 다각형의 판지 위에 복잡하게 꼬인 끈이 얹혀 있었다. 여기서 너무나 가늘고 긴 끈의 끝에 작은 금실 한 다발이 술처럼 늘어졌다. 그것은 앞 챙이 반짝거리는 새 모자였다.(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이 한 단락으로 세 번째 글을 쓰는데,


심정 자체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다. 


인간의 지성은 규정하고 싶게끔 진화되어왔기에 지성은 이 해체 상태에 이미 우리의 소유가 된 언어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다. 좋니 싫니 슬픔이니 기쁨이니 질투니 시기니 하는 몇 안 되는 단어에 분리 불가능한 마음을 구겨 넣는다. 저 마음 자체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은 없다. 아직 없다. 언어로 규정하면 반드시 포함되지 않은 여분의 것들이 있다. 남는 것들은 유사하지 않기에 그 언어에 담길 수 없다. 완전히 반대되는 것들이 분할할 수없이 촘촘히 얽혀 있다. 그리하여 비평가의 겸손한 시선은 그 자체로만, 그리고 그 상태가 가져오는 효과만을 말하게 된다. 그 자체는 '말의 과잉'이라고, 말의 과잉이 보여주는 효과는 '해체'라고.


우리가 어떠한 심적 상태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이름을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성이 작동해서지만 그 지성은 너무나 게으르고 경솔하기까지 한 것일지 모른다.


해체 상태에 있는 심리를 보여주려고 말을 과도하게 늘어놓는 플로베르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뭉뚱그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샤를의 모자를 단지 '샤를의 모자'라고 쓰지 않는 것, 그것은 모자를 보고 있는 보바리 부인의 심적 상태가 플로베르에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며, 그 심적 상태가 모호하고 흐릿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존재하는 말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기 때문이며, 그러나 자의적으로 언어를 만들어 쓰지도 않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우리가 모자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을 사용하되 한 마디가 아닌 수십 마디로 모자를 표현해야만 그 마음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자를 보는 부인의 심적 상태를 완벽하게는 아니라도(완벽은 가능하지 않다) 적어도 '단순하지 않다'라는 사실은 알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샤를의 모자는 복잡하고 조잡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복잡, 조잡 같은 말을 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모자의 명칭들을 늘어놓고 그 모자들의 특징을 합성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샤를의 모자의 복잡성과 조잡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그때 보바리 부인의 심적 상태는 '참' '헐' '세상에' 쯤 아니었을지. 


그것을 다시 "백치처럼 아둔하고 보기 흉하고, 표현력이 매우 풍부한, 애처로운 물건"이라고 쓰는데 거기에서는 샤를에 대한 무시와 역겨움과 연민이 혼재되어 있다. '아둔하고 보기 흉한 것'이 '표현력이 매우 풍부한 것'과 등위로 취급되는 문장은 어절 하나하나를 뜯어볼 때 발견하게 되며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이런 지점에서 놀란다. 상반되는 요소를 한 무리 안에 섞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통념에 반하기 때문이다.


모자의 모양을 보자. 고래 뼈가 있기야 하겠지만 나는 본 적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바깥쪽으로 벌어지게 만들었다는데 바깥쪽이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다. '마름모꼴'과 '벨벳'과 '토끼털'과 '붉은'과 '띠'와 '나눠진'과 '번갈아'들 중에 모르는 말은 없지만 그것들로 표현한 문장으로는 모자의 모양을 더욱 상상할 수 없다. 자루 같은 게 붙어있는 '그다음'은 어디인지 그 끝에 다각형 판지가 어떻게 붙을 수 있으며, 그 위에 복잡하게 꼬인 끈은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얹혀 있을 수' 있을지. 이런(!) 모자를 새로 산 자가 샤를이다.


모자에 대해 잔뜩 묘사해 보였는데 그 모자가 도대체 어떤 모자인지 이미지를 그릴 수가 없다. 모자를 보고 있는 보바리 부인의 심정도 심정이지만 그것은 또 그런 모자를 산 샤를이라는 인간의 정체다. 그 지고지순한 가장이 품고 있는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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