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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0. 2021

너의 글이 좋은 이유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너의 글에 끌리는 이유를 자꾸 발견한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을 토대로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글은 경계가 없는 게 아니라 경계를 넘나든다.'


너의 글을 읽고 나면 강렬한 감정이 풀어지고 강력했던 집착이 가라앉는 듯 가벼워지는 것이다. 너는 예컨대 이런 문장을 쓴다. 


"인간 타묵보다 동양사가 더 유익했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완독한 후 쓴 감상 중에 있는 문장이다. 글로 미루어보건대 너는 저자를 너 자신과 화합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세대의 대표주자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를 인정하고 있으며, 저서의 어떤 부분에 대한 가치를 존중하기도 한다. 


'인간 타묵'은 저자에 대한 인정이지만 조사를 '~보다'로 씀으로써 저자를 좋아할 수 없는 마음을 함께 드러낸다. 문장 전체는, 저자의 말을 담았지만 저자의 삶에 더 집중된 책이기에 오히려 저자의 삶을 조명하기 보다 '동양사'에 대한 저자의 글, 즉 책의 내용에 더 점수를 주겠다는 마음이 들어있다. 너는 "실제로 뒤로 듣고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저자는 내가 힘들어하는 부류의 세대상이다."라고 이후 문장에서 직접적으로 쓰고 있다.  


'저자는 내가 힘들어하는 부류의 세대상이다.'라는 문장도 분명 네가 이 저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하는 문장이다. 그럼에도 보는 나로 하여금 반발심을(신영복 선생을 좋게만 보아왔던 나에게)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왜? '내가 힘들어하는'이라고 쓰는 것은 누구에게나가 아니라 너에게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부류의 세대상이다' 역시 저자의 성격을 한 개인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욕하는 게 아니라 어떤 부류, 세대의 표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너의 관점이 한 개체의 다수성, 그 시대와 역사를 한 몸에 지내고 있는 집합 신체로서의 개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상의 끝을 너는 이렇게 하고 있다.

"한없이 불쾌하고 구물구물 하지만 좋은 책이었다는 말을 끝으로 감상을 마친다."

네가 자주 쓰는, 너의 문체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불쾌한데 좋은 책이었다는 표현은 때에 따라서 양비론자(혹은 양시론자)의 문장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읽히지 않는 것은 아마 너의 글에서 양비론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일 텐데, 문장 하나가 글 전체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엮여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사례이다. '불쾌함' 뒤에 따라나와야 하는 말은 '좋은'의 반대다. 그게 논리적이고 그게 독자가 기대하는 바다. 그런데 너는 아주 많이 독자의 기대에 반하는 말을 그것도 문장 하나에서 구사한다. 불쾌하지만 좋은 책일 수 있다는 것. '나는 불쾌하지만 너희들에게는 좋은 책일 거야'가 아니다. 나는 '불쾌하지만 좋았어'이다. 불쾌하지만 좋을 수 있는 일이 현실에는 많이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게 바로 그렇다. 불쾌하지만 좋았다는 너의 문장을 읽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상하지만 좋다, 내 편을 안 드는데 더 좋다, 나랑 다른데 좋다.... 뭐 그런 거다. 


너의 이렇게 쓰는 능력은 재능일까? 노력일까? 인성일까? 

열려있지 않다면 저렇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가치관이 그렇다 해도 저런 문장에 쓰인 용어, 단어들을 몰랐다면 그러니까 읽고 메모하고 기억하고 그런 전사가 없었더라면 저렇게 못 쓸 것이다. 노력이 있었다 해도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자연스럽게 배치할 수 있는 재능이 없었다면 저렇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글은 재능과 노력과 인간성 모두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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