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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19. 2021

프루스트에게 배우는 글쓰기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그를 사로잡았으나 더럽히지는 못한 광기와 피의 폭발이 도덕적 숭고함으로 가득한 그 얼마나 순수하고 신성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는지를 나는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준 숨결로 그 방의 죄악을 날려버리고자 했다. 그것의 재연은 거의 종교적 의식에 가까운 이 사건, 신문의 잡보란에 실릴 법한 이 사건이 정확히 고대 그리스 비극과 일치한다는 것, 이 가여운 존속 살해범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감히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지성으로 충만한 영혼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자애롭고 경건한 아들,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는 운명-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병적인 운명이라고 표현해보자-이 영원히 그 명성을 남길 죄악과 속죄에 내동댕이쳐 버린 아들임을 증명하고 싶었다.(〈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마르셀 프루스트)



어느 날 아침 신문에서 어머니를 죽인 아들에 대한 기사를 봤다면, 그런데 그 아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프루스트는 지금 그런 처지에 있다. 위의 인용 글은 그런 처지에 있는 프루스트가 쓴 글의 일부분이다.


사건은 1907년 1월에 일어났고 글 역시 같은 해 <피가로>지에 실렸다. 사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 시대의 프랑스 건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건.(100년 전 프랑스는 괜찮았나? 확신하고 썼는데 금방 근거 없음을 깨닫는다.) 존속살해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프루스트에게 경악하고 있는 중이다. 비극적인 사건이나 유사 이래 존속살해는 사라진 적이 없다. 그러나 프루스트 같은 필자는 적어도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확신은 남겨두겠다. 존속살해와 살해범에 대해 저렇게 쓰는 자는 드물고, 발표할 수 있는 자는 전무하다.(또 하나, 저 글에 지면을 내주는 언론사도.)


'프루스트 같은'이라고 쓰고서 잠시 멈칫했다. 자칫 프루스트를 글 쓰는 혁명가 혹은 멋진 이단아로 보이게 휘리릭 쓰게 될까 봐. 


아무런 정보도 없다, 당시 프랑스에서 저 글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더라도 그런 건 결과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나의 관심은, 내 글이 집중하려는 방향은 프루스트로 하여금 편지라는 한순간에서 그 순간 너머로 이야기를 확장해가도록 압박하는 힘이다. 한 통의 편지. 한두 번 양가 모임에 대한 기억. 편지 발신인의 존속살해 기사. 숭고한 도덕심과 존속살해가 공존 가능한 아이러니. 그 예시들, 신화 속의 아이아스, 오이디푸스, 문학의 리어 왕. 자신의 삶에 타자의 그것도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타자의 죽어감이 편재해있음을 돈키호테처럼 뒤늦게야 깨닫는 우리 인간들. 그 슬픈 깨달음은 깨달은 것을 망각하고 사는 기쁨보다 힘이 약하니...


경험을 직접 쓰건, 우회하여 쓰건 모든 글은 쓰는 사람의 경험에서 시작된다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확장하는 글쓰기는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 같다.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를 그런 글쓰기의 모범으로 간주하고 나는 좋은 배움 거리를 얻고 있다. 


프루스트는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오래전 가족끼리의 사교모임을 기억했다. 지금은 존속 살해범이 된 그의 표정과 미소, 살해된 어머니에 대한 묘사들은 프루스트가 한 직접 경험들이고 그 기억의 나열이다. 기억의 확장이 이 수준에서 멈추면 십중팔구 글은 현재로 돌아와 현재의 가치체계에 준해서 참신하지 못한 결말로 이끌린다.


'그때는 그렇게 착했던 사람이 존속살해라는 악행을 저지르다니' 하면서 애석하다는 듯한 포즈로 맺거나, 내면화된 도덕 기준으로 존속살해범을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글이거나, '팩트는 그 어머니가 이상했대 더라', '그 아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아왔다더라' 등 얄궂은 운명 운운하고 맺거나, 지적인 냄새를 풍기며 그런 사태를 만든 이 사회, 이 시스템 운운하면서 반골 기질을 은근히 표하며 맺는 글이 될 공산. 


프루스트는 경험한 것들 수준에서 기억을 끝내지 않았는데(실질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책상에 딱 붙어 앉아있을 그 엉덩이의 힘이라는 건 바로 이쯤에서 필요할지 모른다), 편지를 포함한 기억 속의 그와 존속살해라는 아이러니를 놓지 않았다. 아이러니 속에는 는 언제나 슬픔과 비애가 있고 분명 인간에 대한 호기심, 기이함도 있을 텐데. 사실 재빨리 경험 기억으로 글을 마무리한 필자라도 이런 아이러니를 느낀다, 느꼈다.


프루스트는 그 아이러니를 붙잡고 음미했을 것이고 어렴풋한 비슷한 이야기들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읽었던 신화와 문학 같은. 내용 전체를 기억하는 게 문제는 아닐 거다. '그런 비슷한 얘기가 있었는데...' 정도의 기억이면 된다.(여기서 또 한 번 힘이 필요한데 그것은 게으르지 않을 힘? 책꽂이로 가서 책들을 뒤지는 수고, 인터넷 검색을 하는 수고를 즐거워할 힘.) 흐린 기억은 찾아서 보충하면 명확해질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확장된 기억을 따라가며 쓴 글의 결말은 끌고 왔던 아이러니를 클리어하게 해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진부해지진 않는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존속살해에 대한 사회적 단죄는 결정되어 있다.

프루스트처럼 쓴다고 살해범의 처벌이 가벼워지거나 면해지지 않는다. 프루스트 역시 그런 목적하에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프루스트는 자신에게 비의지적으로 떠오른 기억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가끔은 참고서적도 찾아가며 적어나갔을 것이다. 때때로 글은 '쓸모'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쓰는 사람은 그럼에도 쓰지 않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서 쓰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쓰인 글이 되려 쓸모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사는 곳의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말들과 사고방식들이 지겨울 때, 이런 글이 그린라이트를 깜박이며 다가온다. 각자의 울타리 밖으로, 원한다면 나갈 수 있는 문이 되어주면서. 그것이 가능한 것은 프루스트 같은 그리고 우리 같은 개별자들이 열어젖힌 각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를 읽으며 우리는 우리를 떠나서 프루스트의 세계로 들어간다. 타인의 세계, 낯선 곳, 신선한 곳, 다른 사고방식과 다른 말들이 통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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