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Oct 17. 2021

정혜윤... 존 버거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예술가의 꿈과 편두통은 깊은 감응인 것만 같다. 그들의 언어는 도리어 울컥거리게 만든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꿈속처럼 그들에게만 허락된 심연은, 닿았다 싶으면 멀어지고 또 멀어진다.


한 에세이스트가 픽션 같은 에세이를 지향한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일상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쓰는 글에 필자의 상상력을 더해서 재창조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에세이와 픽션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은 에세이고 픽션이며, 에세이가 아니고 픽션이 아닐 것이다. 


그런 건 혹시 이런 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 에세이스트의 지향을 어쩌면 성취했을 법한 글이 있다. 


말하는 그에게 홀린 건 오래되었고 말하는 그를 볼 때마다 홀린 듯 그의 책을 사서 열 권이나 쟁여 두었다. 한 번도 읽기에 성공한 적 없는 그의 책은 완독은커녕 한 챕터를 읽기도 힘들었다. 그는 정혜윤이다. 어려운 낱말이 많았을까. 아니다. 나는 그의 글이 유영하고 있는 바로 그곳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밟고 있는 땅과 내가 밟고 있는 땅이 다른 곳인 것만 같다. 그의 글에서는 뛰어올라 높이 도달한 자의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그의 글은 편편하고 단조롭고 상식적인 땅 아래를 한 겹 한 겹 깊게 파들어가고 있다.          

소설 같은 수필을 쓴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존 버거의 에세이 한 편, 거기서 우리 모두의 눈이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사물은 단 한 장의 사진이다. 나무와 풀과 하늘과 섞여 피사체가 뚜렷하지 않은, '자두나무 곁의 두 사람'이라 이름 붙은 사진. 한 사람은 존 버거 본인이고 또 한 사람은 '갈리시아에서 온 여인'이다.(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일상에서 가져온 에세이 소설, 소설 같은 에세이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이런 쓰기들은 가능할까. 

일상이라고 부르는 표면 아래에는 표면을 가능하게 하는 넘치는 심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꿈속까지 침범하며 편두통의 고통 없이는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는 이 심연은 사소한 사물 하나를 깊이 사랑하는 시선에게만 허락되었을 것이다. 이들의 감응 능력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능력에 질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어서 떨렸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쓴다'는 행위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