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철학적인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을 의심한다.
'제거한다'라는 주장은 제거될 수 없기 비현실적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회에서 인습은 제거除去가 아니라 재고再考 될 수 있을 뿐이다. 제거보다 재고가 더 현실성 있다. 현실성 있다는 말은 '그것은 안 되니까 이거라도 어떻게 해보자'라는 수세적인 의미가 아니다. 재고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제거는 바람이고 이상이며 바로 그 이유로 환상이다.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무엇이 섞여있다. 먼저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근본주의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행했던 욕망들과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제거하고 남는 것들, 제거되지 않은 것들이 모두 좋은 것일지 장담할 수 없음에도 제거 대상에서 빠졌다는 이유로 좋은 것이라고 착각되기 쉽다.
인습인지 아닌지의 평가는 어떤 사회인가에 달려있다. 가부장제가 조선시대에도 인습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거의 대상인지 아닌지는 당시의 사회 현실에 달려있다. 제거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한 면죄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인습은 악인 것도, 악 아닌 것도 아니다.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동 성추행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동화 작가 한예찬을 두고, 잘 묵혀두었다 때마다 끌려 나오는 질문, '작가와 작품은 분리 가능한가'가 제기되었다. 범죄자의 저서들을 모두 절판시키고 시중 서점과 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쪽과 작가와 저작물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쪽의 주장들이 뻔하게 흘러갔다. 시인 고은, 공연 연출가 이윤택, 영화감독 고 김기덕, 서울대 수학과 전 교수 강석진.... 사건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때마다 두 주장은 반복될 것이다.
그 이유는 제거하고 '잊기' 때문이다. 제거는 문제를 대하는 가장 게으른 방법이다. 제거할지 말지의 판단은 이 사회의 법적 절차에 따르며, 법의 적용으로는 이 사회의 기득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재고는 제거와 달리 오래 걸린다. 오랜 시간 동안 피해자는 고통을 감수하고 관찰자는 문제를 직시하는 일이다. 천년의 가부장제와 그와 함께 딸려 나오는 위계에 의한 성추행이 범죄자의 제거로 끝나지 않는 것은 제거함으로써 망각되기 때문이다. 재고는 제거하지 않고 눈앞에 두고 계속 보고, 자극받고, 어쩔 수 없어서, 때로는 보는 게 지겨워져서, 생각도 해보고 해결 방법도 고민해보고 그러는 일이다.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을 능력이 재고再考 자체에 없다고 해도,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 잊지 않고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범죄를 주춤거리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