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통찰의 온도
나는 외고 나와서 패배감 갖고 있는 학생은 필요 없다.
몇 해 전, 인턴 생활 중 처음 만났던 교수님이 내게 한 말이다. 당시 나는 생애 첫 직장으로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어 자부심을 느끼던 차였다. 교수님을 처음 뵌 곳은 인턴의 진로를 고민하고 아껴주시던 공사님께서 마련했는데, 출장차 유럽에 온 교수님께 더 공부시켜볼 만한 친구라고 소개된 차였다. 그런 자리에서 내 마음을 투명하게 들켜버린 거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꽤 큰 충격이었나 보다. 꽁꽁 잘 숨겨오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패배감이라니. 더구나 지금은 누가 봐도 멋진 스펙을 쌓고 있는 중인데? 교수님이 잘못짚어도 한참 멀리 짚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보려고 한국에 돌아와 교수님의 제자가 됐다.
가까이서 본 교수님은 사람 보는 눈을 가진 분이었다. 수많은 학생을 키워내면서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셨고 많은 제자들이 진심으로 당신을 따랐다. 나 역시 매년 연하장에 당신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소망을 적어낼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를 꿰뚫어 보셨던 그 통찰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쉽사리 알기 어려웠다. 나는 교수님이 가진 안목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진정 본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 알고 싶었을 즈음 안목가의 통찰을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유홍준 선생님의 <안목>을 공부하기 전, 나는 ‘통찰력’에 온도가 있다면 영점 이하의 차가움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물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유홍준 선생님의 어깨에 앉아 그 너머로 바라본 세상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그가 이중섭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 글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중섭, 이중섭” 하면서 그의 예술에 담긴 이런저런 얘기들을 전설처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중섭 하면 가슴 아픈 두 가지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하나는 그의 유작 중에는 정통 작업인 캔버스에 유채 작품이 단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참 이상하게도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중섭 작가가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이중섭 작가는 아내와 아이들과 살았던 행복한 시절을 제외하고는 기나긴 인생의 겨울을 살다 간 예술가이다. 그러나 혹독한 삶 속에서도 예술 활동을 놓지 않았다. 겨울과 함께 찾아오는 고독의 시간에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하며 버텨낸 것이다.
이 모든 해석이 유홍준이라는 안목가의 시선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작품을 평하기 이전에 작가의 삶을 어루만졌다. 시대가 돕지 않았던 예술가의 삶은 그의 시선 안에서 재조명됐고 글의 호흡 안에서 아름답게 살아났다. 그 통찰은 단연코 날카로웠으나 차갑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관찰력이 좋은 편이라 생각해왔다. 주변인의 장점을 찾아 힘을 주는 말을 건네는 것도 즐겨해 왔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보는 시선만큼은 너무도 냉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심리상담사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반면 안목가의 시선은 달랐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예리하되 따뜻했다. 유홍준 선생님은 안목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작품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고, 그 선생님이 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시선을 모방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차갑게 외면했던 나의 겨울을 다시 돌아볼 실마리를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