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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니 Feb 07. 2021

02_겨울을 지나온 이의 뒷모습

겨울이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일흔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 추사 김정희 -



<추사 김정희>의 저자 유홍준 선생님이 건립에 참여한 '추사관'은 추사의 제주도 유배생활과 작품 활동을 전시하고 있다. 책에서 본 위인의 삶을 여행지에서 마주해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고작 삼십 년 간신히 살아본 내 인생도 롤러코스터인데,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는 사람의 삶이 마냥 순탄했을 리가 없다. 그의 삶을 추적해보고자 방문한 박물관에서 빛나는 이름 뒤에 숨겨진 차디찬 겨울의 흔적을 발견했다.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한 자락. 영조의 사위로 총애를 입은 증조부를 두는 등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당대의 엄친아이자 금수저였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바탕으로 연구에 매진한 다재다능한 인재였고, 스승의 마음을 훔칠 줄 아는 인복 많은 젊은이었으니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할 모든 조건을 갖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전시관 지하에서 올려다 본 가시나무를 두른 <추사관>의 울타리



그런 추사에게도 지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그것도 인생의 고락을 뒤로하고 황금기를 즐겨볼 법한 55세의 나이에 제주로 정치적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쉽게 오가지만 당시 제주 유배길은 무려 한 달이 꼬박 걸린 긴 여정이었다. 죄인의 처지로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으로 보내진데 더해 '위리안치'의 형이 내려졌다. 가시 울타리로 집을 둘러 죄인의 집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집안에 갇힌 신세라는 걸 여실히 느껴야 했던 거다. 게다가 한양에서 옥바라지하며 물심양면 지지를 보내던 부인마저도 명을 달리했다. 매서운 겨울의 기세에 그가 느꼈을 참담함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평생 국경을 넘나들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삶이었지만 유배라는 사회적 추락과 함께 그 많던 주변인들도 다 떠나갔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따르는 제자 우선 이상적이 있었다. 청나라에서 구한 귀한 서적을 보내준 제자의 의리에 감사함을 표한 서화가 그 유명한 <세한도>이다.



김정희, <세한도> 1844년(59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상적은 스승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서화를 품고 청나라에 방문했다. 당대 지식인들은 추사 김정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앞다투어 그의 정신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덧붙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추사가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공자의 말씀을 들어 그의 상황을 비유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송백)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물관에 쓰인 이 글귀를 읽자마자 마음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감히 비할 데 없을 지독한 겨울을 보낸 추사 김정희는 위리안치라는 형벌 안에서 '자아를 재발견'했다. 인생의 겨울 한가운데서 그럼에도 스러지지 않았던 높은 정신을 세한도로 그려낸 것이다.


추사가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실학자, 환재 박규수는 추사가 제주 유배 이후 "마침내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없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었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라고 표현한다. 추사 김정희가 평생에 걸쳐 갈고닦아 온 서체는, 격랑 속에서만 진주를 품어내는 조개처럼, 그렇게 겨울을 만나 세상에 둘도 없는 추사체로 태어났다.


어쩌면 겨울이란 건 그 안에 있을 땐 끝없는 터널처럼 느껴지지만 지나고 보면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던 걸까. 겨울이 오면 초록을 자랑하던 풀들은 꽁꽁 얼어 말라죽는다. 하지만 송백은 끝까지 살아남아 푸르름을 보여준다. 나는 얼어 죽은 풀들만 기억하면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수치스러워했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간직해왔던 내 안의 송백이 무엇이었는지, 왜 알아주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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