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야기들을 토대로 실제로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먼저는 펜 앤 워시 그림입니다. 저는 손그림을 펜으로 시작했기에 펜 드로잉을 할 때는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친근함을 느낍니다. 또한 수채화와의 밀당을 통해 더욱더 수채화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펜과 수채가 만나는 펜 앤 워시 그림을 그릴 때는 즐거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하지만 둘 모두를 사랑하는 제게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이 되었던 부분은 바로 펜과 수채의 비율 부분이었습니다.
저의 경우 위에서 정리한 펜 앤 워시 type 1~4까지를 모두 다양하게 그려봤지만 펜도 수채도 그 매력을 잘 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 type 3을 가장 선호하고 있습니다. 펜이 주도권을 가져가지도, 수채화가 주도권을 가져가지도 않는 둘 모두가 주도권을 가진 그림. 하지만 둘 모두가 개성 만점의 주인공들이라 이 비율을 잘 맞추는 것이 항상 과제였습니다. 오죽하면 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제게는 꼭 풀어야 할 과제였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몇 단계를 거쳐 해결하게 되었는데 그 시작은 역시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부터였습니다. 어느 날 정말 매력 있는 펜 앤 워시 그림들을 그리시는 어반 스케쳐 샤리 블로코프(Shari Blaukopf)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샤리 님이 펜으로 일정 부분까지 그리시다가 "펜으로 다 그리지 마시고 수채화로 그릴 부분을 남겨주세요. 펜으로도 수채화로도 그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엇?!' 하고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간 저는 펜 드로잉을 모두 완성하고 수채로 넘어갔었거든요. 펜 라인의 존재감이 매우 확실한데 그러다 보니 정작 채색 시에 수채가 날개를 펼 자리가 현저히 부족했습니다. 그렇기에 펜의 들러리로 잠깐 흔적만 남기고 갈 수밖에 없었죠. 수채화도 너무 좋아하는 저는 이것이 참 맘에 들지 않았었는데 샤리 님의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제 라인은 너무 오브젝트 중심적이었습니다. 펜으로 그리면 오브젝트 하나의 형태가 너무 확실한 것이에요. 채색도 오브젝트를 조금만 벗어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이 어색했습니다. 펜으로 만든 오브젝트 안에 갇혀 그 오브젝트를 채색할 뿐인 그런 느낌이었죠. 수채화에게 참 미안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펜을 최소화하는 방법들을 쓰게 되었는데요. type 3을 넘어 type 4의 펜 앤 워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었죠. 이번에는 뭔가 펜이 수채화의 들러리가 되는 상황도 되더라고요. 이번엔 또 펜한테 미안해집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이클 솔로브예브 선생님께서 저의 그림이 오브젝트 중심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셨을 때도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수업 후 수채화에서는 오브젝트 중심을 벗어나 빛과 어두움 중심으로 그룹화를 시도해도 펜 앤 워시로 그리기 시작하면 곧바로 오브젝트 안에 채색이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제가 위드로 주차 주제를 맡는 차례가 되어서 당시 연습하고 있던 그룹화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를 내었는데 그때 위드로 주제를 함께 그리시던 스텔라 님께서 "펜으로도 이렇게 빛과 어두움 중심으로 그룹화를 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하셨습니다. '펜으로? 오브젝트 형태가 아닌 빛과 어두움에 의한 그룹화를?' 생소한 개념이었기에 궁금했고 이를 바로 시도해봤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020 위드로 주차 주제 중 펜으로 빛과 어두움 중심의 그룹화 시도 - 2020.03.04]
'어 펜으로도 빛과 어두움 중심으로 묶는 것이 되잖아?! 아!!! 또 고정관념 이 놈한테 당했구나!!' 충격이었습니다. 펜으로 형태의 라인을 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면으로 그룹화하는 것이 가능하더라고요. 제 시야를 철저히 가리고 있던 펜 앤 워시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무너지게 되자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펜 앤 워시 그림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브젝트의 형태에 갇힌 라인을 깼더니 수채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겨 났습니다. 제가 원했던 비율 부분도 비로소 적용할 수 있었죠. 현재 제가 그리고 있는 펜 앤 워시 스타일은 이렇게 만들어졌는데요. 마이클 솔로브예브 선생님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멋진 성당이 있는 거리 풍경을 펜 앤 워시로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펜은 후데 만년필에 채색을 위해 방수 잉크인 플래티넘 카본 블랙잉크를 넣어 사용하겠습니다.
우선 눈을 반쯤 감고 이미지를 바라본다면 밑과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하늘의 명도가 건물의 밝은 명도보다 어두워 보입니다. 하늘을 중간 명도에 포함하되 밑으로 내려오며 좀 더 밝아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전경의 차량에 그림자가 덮여 있는데 자동차의 존재감이 확실해서 밝게 빛을 받는 모습으로 변경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있는 위치는 좌측 화면 밖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맞은편에 위치한 성당을 약간 측면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2점 투시이죠. 그릴 때 3점 투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토널 투시를 고려하여 좌측과 우측 변에 붙은 건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어둡기와 묘사를 약화합니다. 이를 썸네일 스케치로 표현하되 이번에는 연필로 그려 봤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좌측에 제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확정된 눈높이 투시를 표시했고 우측에도 화면에서 벗어난 소실 점을 표시했습니다.
먼저 후데 만년필의 두께를 최대한 두껍게 하여 프레임을 잡아 줍니다. 이렇게 하면 상당히 재밌는 프레임이 만들어집니다.
프레임을 잡아준 후 눈높이를 나타낼 수 있는 힌트들을 점이나 간단한 라인들로 살짝 표시한 후 스케일적으로 좋은 참조가 될 전경의 자동차를 그려줍니다.
자동차를 그릴 때 모든 것을 정확하게 그리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특히 하이라이트 공간은 아예 펜을 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자동차와 함께 전체 스케일을 참조할 수 있는 피규어를 그려줍니다.
3점 투시로 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로라인은 땅에서 수직으로 그려주고 화면 넘어 오른쪽 방향에 있는 소실점으로 가로 라인들을 모아줍니다. 2점 투시에서 소실점으로 향하는 라인들은 모든 가로 라인들입니다. 소실점들이 모두 화면 밖에 위치할 경우 실제 소실점이 있을 화면 밖의 위치에 동전 같은 간단한 참조 오브젝트들을 두고 그 오브젝트들을 향하도록 라인을 그리면 수월합니다.
마찬가지로 좌측 화면 밖에 제가 서 있는 곳의 눈높이로 가로 라인들을 모아줍니다.
투시가 적용된 주요 라인들을 그린 후 건물의 특징이 되는 영역들을 간략히 그려 줍니다.
가로 라인들을 그릴 때는 투시에 유의하여 소실점을 향하여! 세로 라인들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 것이 아닐 경우 모두 수직으로! 계속 마음에 다짐하며 진행합니다.
이 단계에서 바로 수채로 들어가셔도 되지만 저는 어두운 곳의 면의 느낌을 펜으로 좀 더 살려주고자 합니다. 이때 본인에게 편하신 해칭을 쓰시면 좋은데요. 저는 반 규칙적인 지그재그 형태의 라인들로 면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개성 있는 해칭들을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약간의 묘사와 면에 대한 표현을 함께 들어갑니다.
그밖에 전깃줄이나 땅의 라인들을 묘사해주고 마무리합니다.
보통 펜 앤 워시로 들어가는 것보다 엉성한, 주요한 부분들만 간략히 표현하고 하이라이트는 손대지 않은 수채를 위한 공간을 남겨둔 펜 드로잉 1단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저는 채색 이후 펜 드로잉을 더해줍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이 수채와의 비율을 맞추는 것에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너무 다 그리지 않고 중요한 부분만 그려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수채화 타임입니다. 뭔가 비어 보이는 펜 드로잉을 수채로 대부분 완성하기까지 채색합니다. 하늘부터 하이라이트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먼저 들어가 주는데요. 저는 하늘의 주 색을 코발트 블루(cobalt blue)로 사용했습니다.
어두운 부분도 하늘의 색을 넣어 그룹화를 먼저 시도합니다.
첫 워시가 끝나면 건물의 밝은 부분에 살짝 웜한 컬러로 채색합니다. 로 시에나(raw sienna)를 기본 베이스로 사용하였습니다.
일부 하이라이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을 채색하되 될 수 있으면 연결하도록 합니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도 단짠의 조화가 좋듯이 쿨 계열 컬러들과 웜 계열 컬러들의 조화를 이뤄줍니다.
빛이 땅에 반사되어 지금처럼 주유소 지붕의 아랫면을 비추는 것과 같은 경우 반사광의 표현은 하늘의 색이 그림자에 묻는 것과는 다르게 웜한 컬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땅은 원본보다 밝게 표현하기로 계획한 대로 진행합니다. 넋 놓고 채색하다가 원본을 따라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중간 명도 면들을 작업할 때 컬러가 달라지며 명도 관계가 틀어지기 쉬운데 이 때도 이를 방지하기 좋은 방법은 눈을 반쯤 감고 지금 어떤 명도로 칠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밝혀줍니다. 자동차 그리기에서 설명하였듯이 헤드라이트보다 더 크게 원을 잡고 안으로 밖으로 블렌딩을 합니다.
흠... 그리고 보니 하이라이트 부분이 좀 밋밋합니다. 역시 옐로우 빛이 필요한 걸까요? 마른 후 수정하기로 합니다.
우측의 전경에 어두움을 표현하되 붓으로 물감 튀기기를 시전 합니다.
여기까지 진행 후 말려 줍니다.
종이가 다 마른 후 어두운 영역들을 들어가며 묘사도 진행합니다.
헤드라이트 작업도 다시 들어갑니다. 완전히 마른 후에 작업하셔야 합니다.
토널 투시의 적용이 적당한 지 살펴보며 중요한 부분들이 더 잘 드러나도록 조절합니다. 이제 말린 후 펜 드로잉 2단계에 들어갑니다.
종이가 완전히 말라야 다음 작업이 가능합니다. 각 단계별 작업이 끝나고 종이를 완전히 말릴 때는 정말 완전히 말리셔야 합니다. 물기가 남아 있게 되면 다음 단계가 진행될 때 원하지 않는 효과들과 얼룩 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의 펜의 주 역할은 마무리를 위한 묘사와 질감을 더해주는 것입니다. 수채화에서 세필로 마무리 작업을 해주는 것을 펜으로 마무리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쉬울 거 같습니다.
면 표현도 중요한 곳에만 더하여 좀 더 원경과의 거리를 벌려줍니다.
새도 넣어서 활기를 더해봅니다.
저는 윈저 앤 뉴튼의 코발트 터퀴즈 라이트(cobalt turquoise light) 컬러를 포인트 컬러로 잘 사용하는데요. 마무리 포인트 컬러 채색을 마무리하면
이렇게 완성입니다. 펜 앤 워시로 그릴 경우 보통 저는 사인을 프레임 밖으로 빼줍니다.
펜 앤 워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계획 단계부터 마무리까지 살펴봤는데요. 펜 앤 워시 그림은 여행 드로잉이나 어반 스케치를 그리시는 분들이 가장 즐겨 그리시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펜은 존재감이 확실하면서도 그리는 타이밍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에 접근하기도 좀 더 수월한데요. 펜 앤 워시를 처음 시도하시거나 수채화에 익숙하지 않으신 경우 펜의 비율을 높여 그려보시며 펜과 수채 비율을 점점 조절하여 자신에게 가장 맞는 펜 앤 워시 스타일을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펜 앤 워시 그림에 이어 풍경 수채화를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