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주는 아름다움
일 년 넘게 단짝 친구와 만나지 못했다. 코로나 초기에 둘이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1박을 했던 기억으로 2020년을 보냈다. 2월 초였는데 취소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마음먹고 만났던 거다.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때였다. 채식 식당을 찾아가고 서촌을 걷고, 서점을 구경하고, 현대미술관엘 가고, 와인을 마시며 밤을 보냈다. 북촌을 걷고 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도 갔다. 에무시네마에서 <윤희에게>도 봤다. 함께한 내내 친구와 책, 영화, 채식, 달리기 이야기를 나누고 그때부터 친구에게 소개받은 '런데이'를 시작했다. 런데이에서 시작해 나이키 달리기 어플을 깔고 서로의 달리기를 응원해왔다.
작년 여름에는 군산 책방 '마리서사'에서 <자문자답>이란 다이어리를 발견하고 두 권을 사서 하나를 친구에게 보냈다. 100개의 질문이 있는 워크북형 다이어리이다. 둘 다 심리에 관심이 많아서, 일주일에 하나씩 써보자고 제안했다. 가끔씩 오늘 몇 번을 썼는데 어땠다는 카톡이나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우리 다음에 만나면 이거 같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했다.
남편의 일정을 핑계로 주말에 온 가족이 친정으로 간 김에, 갑작스러운 만남을 기획했다. 잠깐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면 어떨까 하다가 호텔에서 1박을 하고, 같이 달리기도 하자는 계획을 세운 거다. 온전히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오전과 낮 시간을 아이들과 충실히 보내고(대림미술관, 서촌 걷기, 경복궁 구경으로 우리 셋의 일정을 꽉 채웠다.) 아이들을 놓고 나왔다.
호텔에서 만난 친구와 나는 여의도 공원, 더현대를 거닐며 밀린 이야기로 가볍게 만보를 채웠다. 더현대에서 블루보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하고는, 앤디 워홀 전시를 관람했다. 채식 식당을 찾아 건강한 저녁을 먹고는 맥주와 와인을 사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일몰 무렵 운동복을 입고 한강으로 나갔다. 주황색과 남색으로 채색된 하늘과 푸른 강물을 보며 달리기를 했다. 서쪽을 향해 달리면서 보는 한강물은 빛 때문인지 옥색으로도 보였다. 공기는 적당히 서늘했고, 우리의 달리기는 탁탁 탁탁 가벼웠다. 뒤돌아 달리면서는 짙푸른 강물과 하늘, 반짝이는 야경을 보면서 또 황홀했다. 평소 달리기를 빠른 속도로 잘하는 친구가 달리기 전에
"나 어제도 달려서 오늘 많이 못 달려."
라고 해줘서 나는 오히려 힘이 났다. 친구 속도에 못 따라가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던 것이다. 숨이 찰 정도로 힘들지도 않았고, 한강에서 야경을 보며 달린다는 것에 한껏 기분이 좋았다! 강변에 앉아있는 청춘들과 거니는 가족들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떠올리다가 곧 현재의 달리는 나에 집중하기도 했다.
달리기를 하고 난 후 마시는 맥주는 어찌나 꿀맛인지! (평소 술을 많이 하지 않는 친구가 아까 백화점 지하에서 맥주를 보면서 "너무 많은 것 같애. 우리 하나만 살까?" 해서 무척 놀란 나였다. "아니야아~!" 강하게 외치며 겨우 두 병 사는 게 아쉬웠던 나는, 바로 옆에서 컵와인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컵와인도 두 개를 겨우 사면서 나는 속으로 많이 아쉬웠지만, 소화가 잘 안 되는 내 배를 생각하면서 도합 네 병을 장바구니에 담아 들고 왔던 것이다.) 맥주가 어느새 꿀꺽꿀꺽 사라졌다. 우리는 실은 맥주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있을 때 달리고 나면 얼굴이 정말 빨개지고 몸이 더운데, 그때 돌아와서 마시는 맥주가 정말 맛있다는 것에 크게 공감했던 우리니까.
우리는 와인을 잔에 따르고 각자의 <자문자답> 다이어리를 펼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그동안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라니. 이런 일을 같이 하는 친구가 있다는 거 자체가 고맙고 행복했다! 와인에 취한다기보다 우리의 이야기에 취하고 밤은 깊어갔다. 몇 년 전 같았으면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울면서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문자답>을 들고 대화하자는 계획에 대해 말할 때만 해도, 울게 되면 어쩌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내가 가진 것들을 긍정하게 되었고, 내게 사랑이 많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같이 꿈 얘기를 하고, 심리학에 관한 관심을 공유하고, 정여울 작가의 심리학 특강을 같이 듣고, 같은 책을 공유해 읽으면서 우리는 어느새 튼튼해지고 있었나 보다.
학교에서 '설득의 힘'이라는 단원을 가르치고 있다. 논증 방법에 대한 학습을 마치고 나면, 강연을 들으면서 설득 전략을 파악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 교과서에는 김하나 작가의 '힘들 때 힘을 빼면 힘이 생긴다' 강연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고, 강연을 들으면서 메모하며 듣게 되어 있다. 작년에도 다룬 단원이라서 이미 강연도 듣고 원고도 읽었으며, 작년에 출간된 <말하기를 말하기>에도 강연 내용은 들어 있어서 나로서는 여러 번 듣고 읽은 내용이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다시 강연을 찾아들었다.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김하나 작가님(어느새 존칭이며, 나는 그분의 팬이다.)은 여전히 말씀을 잘하셨고, 나는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님께서 내 눈앞에서 다시 말씀하시므로 또 눈여겨보고 들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황선우 작가님도 마라톤 하는 사진으로 등장하고, 마라톤 끝에 마시는 맥주의 달콤함 이야기를 들으며 또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강연의 말미에
"제가 생각하는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은 인생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인생에 대해서 고마움을 잃지 않을 정도의 조율을 해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하는 부분에서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다 아는 내용이었는데 난생처음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강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힘을 줄 때 주고, 뺄 때 빼고 할 때에야 리듬이 생겨난다는, 그러니 쉼표가 있는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 수 있다는 말로 강연은 마무리되었다.
김하나 작가님이 강연 끝에 말씀하신 '인생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 지난주에 그 부분에서 전율을 느낄 만큼 좋았던 것은, 내 생각이나 내 마음과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 친구와 만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나 또한 인생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미 내 인생은 큰 선물 같다. 다정한 아이들과 나를 지지해주는 남편과 가족, 대화가 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정신적 유산 또한 그거다.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 살아 있어서 참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고 싶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나 신체를 받아들일 줄 알고, 내 한계보다는 가능성을 들여다보며, 내 주위에 내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부모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서, 아이들 또한 자기 삶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을 즐기고 싶다. 혼자서도, 친구하고도, 가족과도 말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친구와 함께 달리기를 하면서 보았던 그 하늘빛과 강물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빛깔을 내 마음에 담고, 더 커진 사랑을 가족과 주위에 전해야겠다. 와인도 때때로 마셔주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러면 내 마음엔 사랑이 여유롭게 흘러넘치리.
* La vie est belle. (인생은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