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이미 봄'이라는 이 책

좋은 책을 발견하는 방법, 함께 읽는 즐거움, <정원가의 열두 달>

by 조이아

친구들이랑 가을 나들이를 했던 남산 피크닉- <정원 만들기>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는 헤르만 헤세, 에밀리 디킨슨의 글귀가 있었던 곳이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공간이어서 눈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창에 글자가 붙어 있었는데 오전의 햇살이 내리쬐고, 글자들은 하얀 전시관에 그림자로 또 한 번 쓰였다. 정원과 관련한 그들의 글이 어찌나 좋던지. 장면 자체가 한 편의 시와 같았다. 옥상에 오르니 환한 가을 햇살과 나무, 풀, 꽃들.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여기가 서울 한복판인 것을 잊게 했다.(나는 서울 한복판엘 가고 싶었던 거지만) 자연이 주는, 생명이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눈부심으로 체험하는 한 때를 보냈다.


피크닉 전시장 곳곳에는 월별 그림과 문구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림도 매력적이고 내용도 독특한 재미를 주었다. 어디서 온 글일까 궁금하던 차에 아트샵에서 원본인 책을 판매하는 걸 발견했다. 동생이 글을 쓰고 형이 그림을 그렸다는 <정원가의 열두 달>이었다. 책 뒤표지에 정여울 작가님의 추천사도 있으니, 좋은 책임이 분명할 것 같았다. 곧 만나기로 한, 가드닝을 좋아하는 인친이 생각나 한 권을 구입하면서 한 권 더 살까 고민하다가 나들이 짐을 늘리기는 싫어 책은 선물용 한 권만 골랐다.

이주일 내내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따스히 바라보았다. 선물할 새책을 읽을 수는 없고, 머리말을 훑어보고, 그림을 한 번씩 들여다봤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아침, 친정집에 같은 책이 있는 걸 발견했다.

"아빠, 이 책도 있었어?” 물었더니 "어, 그 책 있어. 참 명문이야. 잘 읽었어."하시는 아빠의 대답에 나는 놀랐다. "카렐 차페크였던가? 체코 작가라는데, 좋았어."라며 어려운 이름까지 말씀하시는 거다. 허허, 나는 이 책이 집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전에 서점 리스본 정기구독 해드릴 때 왔던 모양이다. 내가 고른 책이 정말 좋은 책이로구나, 내게도 이 책이 있구나, 신난 마음으로 외출하면서 선물할 책을 담은 봉투와 집에 있던 같은 책을 두 권 달랑달랑 들고나갔다. 오랜만에 탄 지하철 2호선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흐뭇했던 건 물론이다.


그 후로 마저 읽은 <정원가의 열두 달>은 정말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분주한 정원가의 이야기가 재치 있는 그림과 어우러져 꼭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림은 어찌나 귀여운지. 신사복 차림이던 정원가의 바지는 무릎이 나와 있었고, 엉덩이를 위로 쭉 올리고 땅을 일구는 그의 몸은 점점 딱정벌레가 되어간다.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정원가의 11월' 바로 다음의 '준비'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메마른 나뭇가지와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그 시간. 자연이 겨울잠을 잔다고 표현하는 그 시간이 사실은 봄을 준비하느라 엄청 바쁜 때라면서 11월이 한 해의 시작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는 거다. 땅속에서는 새봄을 준비하느라 무척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이미 봄이 시작된 거라니! 이런 문장도 있었다.

'지금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현재에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는 거라는 그 부분이 왜 그리 마음에 와닿던지.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어도, 안으로는 속으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일구고 있다는 얘기가 위안을 주기도 하고, 또 오늘을 살아내는 힘을 주는 것도 같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꽃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같고. 오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나의 미래를 만들 거라는 이 글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창한 미래를 준비한다기보다는 지금의 나를 더 가꾸고 싶어진 기분을 갖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책 표지에 '카렐 차페크는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라는 개미보다 작은 글씨가 크게 다가온다.



<책읽아웃> 팬으로 알게 된 인스타 친구이자, 줌으로 독서모임 때 얼굴을 본, 간혹 디엠을 주고받으며 동갑임을 확인한 친구와의 첫 만남. 식물 가꾸기에 열심인 데에 정원 관련한 이 책을 선물했는데, 친구는 이미 그 책을 알고 있더랬다. 게다가 이미 갖고 있던 책이라니. 가드닝 분야의 명저였는데 나만 몰랐구나! 완독은 못 했다는 친구가, 내가 준 책 덕분에 완독할 거라고 답해주어서 덜 민망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역시 신간을 준비했어야 하나. 친구를 위해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써 본다. 11월까지 읽어보라고!


나만 모르던 이 책은 1929년에 쓰인 책으로 2019년에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다. 나로서는 지금이라도 이 책을 읽어 뿌듯한 마음이다. 지금의 나는 흙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40대이지만, 또 모르지. 언젠가 나만의 정원을 가꾸게 될지. 그렇다면 그때에는 더 와닿는 책이 될 거다. 지금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부분에 꽂혔지만 나중에는 또 어떤 부분에 마음이 끌릴까.

서점에 갈 때마다, 인터넷 서점에 접속할 때마다 신간에 홀린다. 자꾸만 책장에 새책을 꽂게 된다. 꼭 신간만 좋은 책은 아닐 터. 나는 종종 이렇게 늦게라도 좋은 책을 발견하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고. 피크닉 전시에 갔던 두 친구에게 오랜만에 손편지를 써야지. <정원가의 열두 달>도 추천하고 보내줄래. 친구랑은 책장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묵혀두었던 편지지를 꺼내야겠다.


@ 카렐 차페크 글, 요제프 차페크 그림, <정원가의 열두 달>, 펜연필독약

@ Piknic, <정원 만들기 Gard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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