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

무용의 쓸모

by 조이아

학교 시험 기간이다. 교사가 홀수 쪽으로 시험지를 만들면 마지막 장은 빈 종이가 되어, 시작령이 울리기 전 인쇄 상태를 확인하고 빈 종이를 맨 위에 두고 대기할 수 있다. 응시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데에도 좋지만, 문제를 다 풀고 나서 그 종이에 한껏 낙서를 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그러나 우리 국어과는 시험지 면수를 홀수로 만들기에 번번이 실패한다. 지난 중간고사 때에는 기세 좋게, 7쪽으로 만들자 해놓고는 결국 8쪽짜리 시험지가 나와서 네 장이나 나누어 주어야 했다. 이번 기말고사에는 문법 부분이 많아서 4쪽으로 줄일 수 있었지만, 5면으로는 만들지 못하고 종이를 아꼈다. 얘기가 샜는데 어쨌거나 시험지 면수가 홀수면, A4 크기의 온전히 비어있는 한 면이 학생들에게는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 2교시는 세 장의 시험지가 5면으로 된 사회 시간이었다. 문제를 풀던 아이들이 조금씩 긴장을 푼다. 뜻 모를 낙서를 하거나 자세를 잡고 엎드리는 거다. 나 또한 감독 업무에 집중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 즈음이 되면 머릿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르기 마련이다. 정감독의 위치에 서서, 맨 앞자리의 아이가 빈 시험지에 하는 낙서를 흘긋 보았다.

시험지를 가로로 놓더니, 선과 동그라미, 선과 동그라미를 잇는다. 꽤 정교하게 이어진다. '뭐야, 노선도라도 그리려나' 했는데 정말이었다. 처음에는 글씨 없이 선으로 된 커다란 네모와 선들이었다. 그러다가 보태어지는 글씨는 깨알 같이 '성수', '건대입구', '정발산'이라고 쓰였다. 다 알아볼 수는 없어도 지하철역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위치한 지역은 서울이 아니지만 우리 '중3이'는 서울의 지하철 노선도를 그리고 있었다. 커다란 직사각형이 된 선은 물론 순환선인 2호선일 테다. 자연스레 지하철 특히 2호선과 관련된 추억이 떠올랐다. 지하철을 이용했던 건 대학 때였는데, 집과 학교 - 늘 같은 구간을 다녔지만, 언젠가 저 순환 노선을 한 바퀴 돌았던 것도 같다. 그때가 잠들어서였나 갸우뚱하다가 이내 기억한다. 맞다, 지하철에 놓고 내린 책 때문이었다.

3학년 가을이었다. 2학기에 새로 마련한 원서는 하드커버 표지에 두께가 15센티미터는 족히 되었을 거다,라고 쓰려다가 7센티미터쯤으로 정정한다. 생물교육 전공자의 책으로 지금은 과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아마 미생물학이었거나, 음, 미생물학은 2학년 때 배웠으니 아닐 텐데, 모르겠다. 전에도 썼듯이 나는 대학에서 4년 간 과학교육을 공부한 사람이다. 분명 분자생물학도 아니었는데 다른 교과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함께 지하철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원서가 무거워서 선반에 올려두었는데 내리고 나니 몸이 너무 단출한 거다. 그때는 다 그랬죠? 원서를 멋지게 들고 다니던 사람, 나다. 개강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으니 그러니까 새책이었다는 거다. 지하철을 태워 보낸 원서를 찾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역무실에를 가보았다. 책을 두고 내렸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디서 탔는지, 방금 내렸는지 등을 물으신다. 그러고는 2호선 전철은 순환하니까 시간대를 잘 맞추면 찾을 수 있을 거란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반대 방향을 타고 땡땡 역에서 내려서 우리가 탔던 칸(전혀 기억나지 않지만)을 찾아보라고 알려주셨다.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 다시 우리가 탔던 차를 타자는 거지? 둘은 신나게 지하철 여행을 했다. 시간도 마음도 넉넉했던 모양이다. 일러주신 역에 내려서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를 타 열차의 한 량 한 량을 훑어보았다. 이번 차가 아닌 것 같으면 그다음 차를 또 탔다. 그리고는 정말 선반에 그대로 놓여있던 그 책을 찾았다! 지하철 2호선이 한 바퀴를 돈다는 것과 관련한 이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 (모험 끝에 찾아낸 책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결론은 없다.)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참 신기하다. 아이가 그린 지하철 노선도 덕분에 나는 시험감독을 하면서 지하철 모험을,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사람을, 20년을 거슬러 떠올렸다. 시험 시간이 끝나면 아이에게 어떻게 이렇게 지하철 노선을 외워서 그리는지 물어봐야지 마음 먹었다. 막상 종료령이 울리고 OMR카드를 세어 답안지 봉투에 넣고 보니 아이는 자리를 뜨고 없다. 다음에 할 이야기가 생겼다.


시험 기간에 감독을 할 때면, 나는 남은 시간에 그들이 하는 행위가 너무 보기 좋다. 보통은 엎드려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지만, 주어진 여백에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편다.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기도 하고, 그리운 이의 이름을 쓰기도 한다. 무용한 그림들, 낙서들, 어쩌면 이게 진짜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는데. 오지선다의 답으로는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여백의 시간과 무용한 공간에 이르러야 우리는 진짜 우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흔적이야말로 타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이디어의 씨앗이 될 터. 오늘 내가 시간을 거스르는 마음속 여행을 한 것처럼 말이다. ‘저 아이는 마킹을 다 하고 엎드렸겠지?’, ‘오 분 남았는데 아직도 컴싸를 들고 고민하고 있네, 나머지는 다 마킹했겠지?’하고 걱정을 하는 틈에 시험지 뒷면을 모아 전시회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마침 수능일, 수능 답안지를 뺀 나머지 공간과 수능일을 마치고 동짓날 밤같이 굽이굽이 펼쳐질 시간을 바탕으로, 수고한 청년들이 그려나갈 흔적들을 힘껏 응원하고 싶다.

일단 나는 빽빽한 국어 시험지에 여백을 많이 만들어 줘야겠다. 할 수 있다면 홀수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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