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하나, 시디 한 장이면 행복하던

나를 채우던 음악들은 어디로, 나의 젊은 날은 또 어디로

by 조이아

남편의 학회가 열린다는 덴마크 이야기를 하다가 오래전 좋아하던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애플뮤직에 denmark를 입력하자 나타난 그리운 앨범 - 하얀 바탕 표지의 Duke Jordan, 'Flight to Denmark'다. 음악을 재생하자 잊고 지내던 추억이 살아난다. 비가 내리는 날 들어섰던, 이대 앞 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곡이었다. "이거 무슨 음악이에요?" 묻고 사들고 나와서는 정말 많이 들었는데 어느샌가 시디 케이스만 남고 시디는 사라져 버렸다. 알맹이가 없으니 케이스가 소용이 없는데도 한동안 차마 버리질 못 했다. 음악가와 제목을 잊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던 시디를 처리했다. 가요 음반으로는 김동률, 이소라, 이상은, 조규찬의 것이, 재즈 음반은 거의 다가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과는 별개로 시디를 이용해 음악을 듣는 건 정말 십 년도 더 된 것 같아 큰맘 먹고 치운 것이다. 개중에는 중학교 때 친구 M이 선물한 ‘전람회’ 시디도 있었다. 단짝이던 중 3때 소풍지에서 둘이 발맞추어 걸으며 전람회의 '여행'을 흥얼거릴 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음악이었다. 테이프로 많이 듣다가 나중에 M이 생일선물로 뭘 해줄까 물었을 때 전람회의 시디가 갖고 싶다 했더니 1집에서 3집까지 세 장이나 주었던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고등학생 때였나, 강원도로 피서를 갔던 어느 여름 밤 시디플레이어로 홀로 듣던 전람회의 음악은 내 온몸을 채우는 듯 충만한 기분을 선사했다. 그 푸른 밤의 수많은 별도 밤공기도 다 생생하다. 그때는 음악 테이프 또는 시디 하나면 너무나 큰 세계를 만난 듯이 기뻤는데.


중학생 때 자주 가던 음반가게가 있었다. (무슨 레코드점이었더라.) 시험기간이 끝나면 내게 주는 선물은 바로 음반가게에 가서 테이프 하나를 사 오는 일이었다. 집을 나서서 골목을 지나 큰 길가에 있는 그 음반가게에 다녀오는 길이 참 설렜더랬다. 집으로 돌아와 비닐을 뜯는 기분은 짜릿했고. 손바닥보다도 작은 표지는 예술적이었다. 겉면 혹은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 안에 있는 노래 제목이며 가사도 얼마나 꼼꼼히 읽었는지.


중3 크리스마스 때 친한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셋만의 시간을 기념한다고 같이 음반가게에서 각자 하나씩 신중하게 음악을 골랐다. 내가 고른 것은 '더 클래식'의 크리스마스 앨범이었고 이번에는 큰맘 먹고 시디로 샀다. J는 '시네마 천국' OST를 골랐다. M이 무얼 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 둘을 이렇게 기억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음반가게까지 신나는 걸음을 하고 집으로 와서 시디를 재생하려고 보니 시디의 크기가 너무 작은 거다. 시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이 작은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은 왜 이리 작단 말이냐. 보통 사이즈의 그 시디가 아니라면 우리 집에 있는 전축(그땐 전축!)으로는 들을 수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이미 뜯었지만, 할 수 없이 가서 말씀드리고 바꿔야겠다고 우리끼리 재잘댔다. 크리스마스 음악이 없는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인가 가게에 들고 갔더니, 그냥 넣고 재생하면 들을 수 있다는 거다. 가운데 동그라미만 맞으면 다 재생되는 거라니 나는 왜 그걸 몰랐단 말인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야 듣는 크리스마스 음악은 왠지 그 설렘과 흥분이 조금은 가셨던 것 같다. 그래도 내겐 또 하나의 선물이 생겼는데, 그날 J가 구입했던 '시네마 천국' 테이프가 결국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오빠에게 선물할 거라던 친구가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에는 피아노를 전공할 예정이었던, 지금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이 친구 덕분에 나는 음악 취향을 넓힐 수 있었다. '시네마 천국'도 그렇고, 친구가 빌려준 테이프 덕분에 Cleo Laine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더불어 John Williams 기타 선율의 아름다움도 알게 되었으니까.


시디를 버리기 전에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나. 시디의 표지만 봐도 들려올 음악과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는데, 그것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아 너무 아쉽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재생하는 시디마다 자꾸 튀거나 멈춰서 그랬다고 변명해 본다. 책장의 두 칸이나 자리 차지를 하고 있는 시디를 볼 때마다 저 위에 쌓인 먼지가 먼저 보였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눈에 보여서 찾아 듣는 것과 머릿속에서 떠올려 찾아 듣는 것은 다른데 나의 한 시절이 뭉텅 잘려나간 기분이다. 특히나 선물 받은 시디들이 그렇다. 시디 한 장마다 떠오르는 사람 - 그 안의 우정이며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지. 뉴에이지 동호회의 추억과 피아노곡들. 학교 후문 앞 하늬솔 B에서, 대학로 천년동안도에서 박수를 치며 듣던 재즈들. 첫사랑과 함께 듣던 <러브 레터> OST나 정재형 또는 리체 이상은의 음악들. 내게는 음악인으로 보였던 사진 동호회 선배님 덕분에 알게 된 곡들. 젊은 날의 시간들이 재즈처럼 두서없이 그러나 아련하게 내 마음속에 흐른다. 추억은 버려졌지만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렇게 적어 본다.


둘째가 포켓몬 카드를 박스로 사면, 그 안에는 다섯 장씩 들어있는 비닐팩이 여럿 들었다. 그걸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할 때 형님을 앞에 앉히고 하나씩 깐다. 비닐을 벗기고서도 겹친 카드를 하나씩 들추면서 자기들끼리 브이맥스 어쩌고, 리자몽 어쩌고,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신나한다. 저 마음이 내가 중학생 때 음악테이프의 비닐을 뜯어내면서 느꼈던 희열과 비슷한 걸까. 아무 소용도 없이 그저 수집만 하는 카드가 참 아깝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카드 한 장마다 반짝이는 비닐로 감싸고, 또 단단한 케이스에 넣어 지문도 안 묻게, 구겨지지도 않게 보관하는 그 마음이 그저 먼지만 쌓이게 방치하다가 못 쓰게 만든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어딜 가나 품절이라는 포켓몬 카드. 그렇다면 목요일 다섯 시마다 포켓몬 카드가 도착한다는 알파문구엘 방문해야 하는 것인가. 수요일 저녁, 오랜만의 이 감성을 또 이렇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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