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앉아 있는 딸을 일으키는 엄마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by 조이아

K마트는 파리 15구에 위치한 한인마트다. K마트에서는 그동안엔 내 눈에 띄지 않던 식재료마저 달리 보인다. 그리 즐기지 않던 라면 하나도 소중해지고 추억의 과자도 꼭 챙겨 넣게 된다. 전엔 거들떠보지 않던 냉동 순대가 특별식으로 보이고, 대중적이지 않은 상표의 어묵도(당연히 냉동이다)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K마트에서의 추억이 소환되었다. H마트는 한아름마트의 약자로 미국 내의 한인마트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H마트엘 엄마 따라다니던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이다.

<H마트에서 울다>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이다. 애증의 모녀관계와 더불어 암 투병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애도하는 과정까지 담겼으며, 뮤지션으로 성장하는 성장담으로도 읽힌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엄마가 해주신 음식에 담긴 추억으로 상실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일 거다. 그 음식은 다름 아닌 한국 음식! 미국에서 자란 저자의 눈으로 보는 한국 음식은 색다르고, 우리가 아는 맛에 대한 설명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이를테면 미역국은 영양소가 풍부한 해초 수프, 계란찜은 풍미가 좋은 계란 커스터드라 설명한 부분이라든가, 김치를 장밋빛(!)이라고 표현한 곳이 그렇다. 한국 식당의 반찬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을 테트리스에 비유한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는 변화무쌍했다. 선머슴처럼 행동해서 자꾸만 혼나면서도 그런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엄마가 아끼는 물건들을 닦고 칭찬받고 싶어 했다. 집을 완벽하게 정돈하기를 좋아하던 엄마에게 자신과 아빠는, 엄마만의 환경을 어지럽히는 훼방꾼 같았을 거라는 묘사가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 어린 미셸은 부모에 대한 끔찍한 꿈을 꾸기도 했는데 이런 악몽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청소년기에 심한 우울증을 겪은 미셸에게 아버지가 자신 또한 그랬음을 고백한 걸로 보아, 아버지의 유전적인 요소가 작용하기는 했을 거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적나라하게 하는 엄마에게 상처받고, 가시가 잔뜩 돋친 청소년기를 지나, 음악에 몰두하고 대학은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진학했다. 이런 가정사를 읽으니 모녀 관계에 대해 복잡한 심경이 된다. 그렇다고 모난 엄마는 전혀 아닌 것이, 딸을 향한 말과 행동에는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일 터. 예술을 한다며 창고 혹은 쓰레기통 같은 장소에서 지내는 자신에 대해, 아무런 비난 없이 집밥 생각을 나게 하는 음식인 갈비를 재워주고 간 엄마에 대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돈된 집에서 정성 담긴 음식을 먹이며 키운 딸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사는 걸 확인했을 때 미셸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갈비를 재웠을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상실감은 책의 초반, H마트에 들어서서 마주하는 다양한 식재료 하나하나에 대한 추억으로 되살아나 미셸을 울게 한다. 엄마의 부재에 대한 혼돈의 시간을 보내면서 미셸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것 같은 정체성의 혼란 끝에, 자신 안에 엄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엄마의 김치냉장고 안에서 발견한 묵직한 김치통 안에는 비닐로 싸여 있던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던 미셸은 사진 속엔 없어도 늘 애정의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엄마를 인식한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수백 장의 사진 속에서, 피사체인 자신을 향한 엄마의 시선을 느낀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기억의 보관소인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자신이 엄마를 기억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미셸은 엄마와의 추억을 한국 음식을 만들면서 다시 자기 안에 차곡차곡 쌓는다. 엄마에 대한 미셸의 글 또한 엄마의 삶을 보존하는 형태가 되었을 테다.


투병하는 엄마와 통화하다 우는 미셸에게 엄마는 오히려 그를 달랜다. "괜찮아, 괜찮아." 자신의 아픔보다 딸에 대한 모성이 더 큰 엄마.

똑같은 음성을 나는 멀리 이탈리아에서 들은 적이 있다. 친구와 둘이 하던 여행이었는데 베로나를 떠나던 날이었다.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다른 도시로 떠나는 기차를 타러 부지런히 기차역으로 갔는데, 우리가 선로에 다다랐을 때엔 이미 기차가 떠난 후였다. 그다음 기차표를 다시 사고,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우리 앞에는 강이 흘렀고, 공기도 고요했다. 이 여행을 한다고 한참 전부터 다양한 책을 읽고 숙소를 알아보고 촘촘하게 일정을 짜고 계획을 했었는데 이 짧은 순간에 이렇게 어그러지는 것에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종종거리며 다니던 내 앞에 펼쳐진 그 고요가 오히려 나를 더 먹먹하게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었고 그 에메랄드빛의 시공간에서,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허전했다. 그때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하고 말이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났을 그 목소리는 분명 우리 엄마였는데, 멀리 있던 엄마가 나의 불안함을 느낀 것인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목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옆에 있던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경험이었기에 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길 털어놓질 못했는데, 그 '괜찮아, 괜찮아'는 분명 엄마의 것이었고 나는 그 잠깐의 신비 덕에 낯선 도시에서 느끼던 막막한 공허를 달랠 수 있었다. 내 경험은 미셸의 슬픔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나는 그때 엄마와의 연결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주저앉아 있는 딸을 일으킨다.

책을 읽으며 나의 경험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의 기록은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로 안다. 내 안에 있을 엄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다.

@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문학동네, 정혜윤 옮김

@ 김하나, 황선우,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Ep.6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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