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건네는 말을 듣는다는 것
"렬!"
"렬!"
무슨 소린가 했다. 나란히 복도를 걷는 두 학생 뒤에서 교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이가 자꾸 친구 말에 힘차게 '렬!', '렬!'을 반복한다. ‘진짜’라는 말이 ‘레알’도 아니고 ‘렬’로 바뀐 걸까? 렬 중학생과의 대화를 기록해 본다.
담임을 맡고 아이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만난 지 삼일 만이었다. 조회시간 종이 쳤는데도 학교에 오지 않는 학생에게 전화를 거니,
"선생님~ 엉엉! 학교 가기 싫어요! 엉엉"
하면서 운다. 당황은 잠시, 어쩜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건지 중학교 3학년이 맞나 싶어 하마터면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라 나를 지칭할 뻔했다.
한 번은 수업 중에 활동 시간을 주고 교탁 앞에 서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할 것 같은 톤과 크기로 속삭이며
"선생님, 초콜릿 있어요?"
묻는 거다. 수업시간에 초콜릿을 찾는다고?
"뭐라고?"
되물으니,
"초콜릿이요."
라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어? 없는데? 왜?"
연거푸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 왈,
"당 떨어져서요."
하고는 곧장 맨 뒷자리로 들어간다. 혹시 아이가 건강상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서, 다시 아이에게 가서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거야?"
그랬더니
"아뇨, 당 떨어져서요. 배가 너무 고파요."
헐, 배가 고프다고 수업 중에 나와서 간식을 찾는 학생이 있다니.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아이가 잠을 못 자서 두통이 심하다며 조퇴를 하겠다고 교무실로 왔다. 중학교 입학부터 코로나와 함께한 학년이라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집에 머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머리가 많이 아프구나. 약 먹고 참아도 힘들겠어?"
묻자,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어제 공부하다가 늦게 잤는데, 학교에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서 공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엥? 시간이 아까워? 학교에서 수업 듣는 시간이 아깝다고? 질문의 파도가 내 안에서 몰아쳤다. 시험 일주일 전이었다. 아니, 그 시험 문제는 누가 내는데? 시험까지 진도도 아직 남아있을 텐데?
이렇게 표현하는 아이들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한 번쯤은 걸러도 좋을 텐데 여과 없이 자기 생각을 말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점에서 이렇게 솔직한 학생들이 부럽기도 하다.
가벼운 대화가 아니라 묵직한 얘기를 꺼내놓는 학생들도 있다. 3월 첫 상담부터 부모님의 멀어진 관계를 털어놓거나, 우리 반도 아닌데 내 앞에 앉아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나도 같이 숙연해져서는 나를 믿으니 이런 얘기를 하는 거겠지 하는 고마운 마음으로 진지하게 듣고 반응한다.
아이들에게 편안한 어른이고 늘 기분 좋은 어른이고 싶다. 쉬운 일은 아니다. 대화란 주고받는 것인데 예의 없거나 날 선 말에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청소년은 뇌가 공사 중이라고 하지 않던가. 호르몬의 폭풍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터, 아이들의 변덕과 적나라한 솔직함을 귀엽게 봐줄 여유를 갖고 싶다.
1학기 소설 수업을 마친 후였다. 소설의 첫 문장이 주는 느낌이라든가, 공간적 배경의 의미와 제목의 상징성 등에 대해 설명했다. 한 학생이 쪼르르 복도로 나오더니 교무실을 향하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팔을 대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첫 문장에 나온 가파른 골목길이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 기울기 같지 않아요? 아버지는 따라갈 수 없는 속도. 소설 뒷부분을 읽는데 소름 끼쳤어요! 의미 찾는 거 너무 재미있어요!"
그와 동시에 나도 짜릿한 기분이 느껴진다.
"오~ 그렇네. 가파른 속도! 기울기! 맞아 맞아, 멋지다! 소설을 해석하는 재미가 있다니까!"
너도 아는구나, 소설을 분석하며 느끼는 이 기분! 짧지만 딱 그만큼의 대화로도 아이와 통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평소에 말도 없고 아직 이름도 잘 모르던 학생이었지만, 그 잠시 동안 우리의 영혼이 서로 찡긋 인사를 나눈 기분이었다. 이런 대화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수업마다 내 이야기에 끄덕이고 책 얘기를 나누는 학생이 있다. 여름방학 도서관 행사인 독서마라톤 때, 내가 소개한 김동식 작가의 모든 책을 완주해 읽은 학생이다. 책상 위에 놓인 천선란 작가의 책을 보고, "나도 이 책 좋았어. 다른 책도 그렇고 환경 얘기도 하고 내용이 정말 좋아."
했더니
"저도 진짜 좋아해요."
하며 방긋 웃던 학생으로
"나는 콜레트(가명)랑 얘기하는 게 너무 좋아."
를 두어 번이나 말하게 했던 학생이다. (고맙게도 자신도 그렇다는 예의 바른 대답을 들려주었다.) 지난달에 이 아이에게 USB를 받았다. 글 쓰고 있다는 얘길 들을 때마다 응원을 해왔는데, 소설 쓰기를 끝마쳤다며 정중하게 추천사를 의뢰해주었다. 소설을 읽고 추천사를 정성껏 써서 다시 USB를 건넸다. 이제는 작가라 부르고 싶은 이 학생과는 수업 전후에 나누는 찰나의 대화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낀다.
아이들이 하는 얘기 중에는 그저 배출하고픈 것도 있을 테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하는 말도 있을 테다. 재채기처럼 안 하고는 못 참는 이야기, 그런 얘기들을 들어주고 싶다. 어른들과의 대화하고는 또 다른 재미와 애틋함이 있다. 수업 내용에 대한 것이든, 글에 대한 것이든, 자신의 가족에 대한 것이든, 나만의 두려움에 대한 것이든 핵심을 건드리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들 편이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다. 어떤 얘기든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도록. 엄청 무거운 이야기를 듣게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뿐일 터. '네가 지금 여기에 있구나. 이런 기분이구나.'를 읽을 줄 아는 어른이고 싶다. 그럴 때면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이지만 우리들의 영혼은 서로를 안아주며 기쁘게 웃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