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처럼 행복한 격리생활
코로나 시대, 학생들이 학교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현재 중3은 입학식도 미뤄졌고 5월 이후로 등교하면서 원격수업과 대면 수업을 번갈아 했던 학생들이다. 학기초 상담할 때부터 자기는 학교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차라리 집에서 조용히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다고 자꾸 조퇴하고 싶어 하던 학생이 있다. 반 친구들을 사귀기 전이라 유독 더 그랬을 것이다. 엄마가 조퇴를 못 하게 한다고 우는 아이를 달래며 대화를 했더랬다. 몇 개월이 흐른 지금은 만날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있고 눈웃음으로 내 기분을 좋게 한다. 다만 생리결석이나 간혹 아프다고 결석할 때도 있지. 최근 어머니와 상담에서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가족 코로나로 격리되었을 때, 이 아이가 얼마나 제 방에서 잘 지냈는지를 알려주셨다. 가족들은 다 힘들어하고 답답해했는데 이 아이가 너무나 행복하게 격리생활을 했다고 말이다. 카미유(가명)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나의 격리기간, 나도 그 아이처럼 행복한 격리를 하고 싶었다.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이것은 내 꿈이 이루어진 것 아닌가. 물론 기침과 열과 근육통과 코막힘 등과 함께라 온전한 내 시간이라 하기에는 내게 붙은 코로나의 부피가 크기는 하다. 그래도 온전한 내 시간이라니! (온전한 내 시간이라는 말은 취소할까. 오전에는 학교 일로 대기-출근시간에 맞추어해야 할 일들이 꼭 있었다. 출결 변동은 내게 연락이 왔으므로.) 끙끙대며 앓던 시기를 조금 지나면서 침대에서 지내는 게 내게는 쉬는 일이었다. 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고 또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모닝페이지를 하고, 노트북을 침대 위 테이블에 펴놓고 브런치를 썼다. 해야 할 일과 한 일 목록을 작은 쪽지에 적어나갔다. 한 일들을 지워가며 세 장을 버렸고, 한 장에 다음 주 출근하면 해야 할 일을 갈무리해뒀다.
에세이를 즐겨 읽는 내가 격리기간에는 소설을 몇 권 읽었다. 다른 것에는 잘 집중이 안 되었다. 자꾸 할 일이 생각났고, 업무 카톡은 자꾸 울렸다. 아니 에르노의 짧은 소설 한 편, 사두고 못 읽던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신간 나왔을 때 사고 반 정도 읽다 멈춘 정세랑 작가의 <아라의 소설>, 신뢰하는 다독가 동료가 추천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차례로 읽었다. 눈물을 찍어내며 위안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넷플릭스도 꽤 보았다. 이 무궁무진한 선택 앞에서 어떤 영화든 볼 수 있지만 망설이며 영화를 골랐다. 그저 안전하고 안심이 될 만한 게 아니라면 피로하게 느껴졌다. 결국은 보고 있던 드라마나, 보다 말았지만 나쁘지 않았던 시리즈, 누군가가 좋다고 했던 추천작을 뜨뜻미지근하게 보았다. 이야기들이 나를 격리된 몸으로부터 얼마간은 해방시켜 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내 것이 아닌 시간들을 붙잡은 기분이었다. 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이야기를 붙들고 있던 건 아닌가.
몸이 좀 나아진 후부터는 다정한 이들이 전해준 온기로 시간을 보냈다. 하나는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 동료 선생님이 추천해준 것으로, 와인이랑 맛난 수다를 떨던 식당에서 디저트로 나온 밤 조림을 먹다가 강력한 추천을 받았다. 내가 좋아할 거라고, 꼭 내가 봐야 한다던 그 고운 마음을 온종일 붙들고 앉아(간혹 누워서) 코모리가 배경인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시간이 꽤 걸렸는데 다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처럼 한 장면도 놓치면 안 된다는 마음 없이 편안하게 틀어놓고 자연의 풍광과 음식 보기를 즐겼다. 가짜로 살아가는 것 말고, 진짜 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통찰이 담긴 것 같아서 가볍지만은 않은 드라마였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즐겼다. 그리고 보는 동안 정말 좋았다.
두 번째 내가 받은 온기는, 확진일부터 다정함을 전하던 친구가 보내온 책이었다. 백수린 작가를 알게 해 줘 고맙다며 그의 신작 에세이를 보내주고, 나중에 같이 모마 미술관에 가자는 제안과 함께 <그림들>이라는 책을 보내줬다. (같이 뉴욕을 여행하자는 제안을 딸 있는 친구가 해주다니, 아들만 있는 엄마는 이 친구에게 잘해야 한다.) 영 에세이가 잘 안 읽히다가 백수린 작가의 가볍고 예쁜 에세이를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은은하게 따사로운 글들이었다. 제목부터가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다. 여기저기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아껴 읽었다. 백수린 작가의 집과 동네와 산책과 강아지와 글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이면서 내 이야기처럼 공감하게 되었다. 이런 공감을 하고 싶어서 내가 에세이를 좋아하지.
책의 끝에 다다를수록 나와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코로나인데도 왜 이렇게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고, 이 시간을 어떤 쓸모로 만들고 싶었을까. 책을 읽을 때에는 음악이라도 틀어놓고, 샤워를 할 때에 팟캐스트라도 켜놓는 내가 좀 이상해. 시간을 그저 흘러가게 두지 않고, 꼭 뭔가를 하려고 하는 나, 왜 이러지?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들다가도 이게 나라는 생각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확실해졌다. 나답게 지내고 있었다고 말이다.
내 침대와 작은 책상에서 5일여를 지내면서 읽고 싶던 책들을 세워놓고, 여유로운 아침시간 모닝페이지를 했으며, 업무를 보는 틈틈이 좋은 음악으로 이야기로 나를 채웠다. 낮 시간을 방에서 지내면서, 낮이 되면 여기로 이렇게 환하게 빛이 드는지를 처음 알았다. 이토록 환하게 빛나는 방에서 몸을 추슬렀고 다정함을 궁리했다. 내가 작성하던 할 일 목록 중엔 이런 것도 있다. 우리 반 간식 쏘기. 우리 반은 공부를 잘하는 반은 아닌데, 이번 시험 국어 1등이란다. 이 녀석들이 내 사랑을 알아챈 게 틀림없다. 내게 마음을 전하고 있군, 하고 혼자 착각을 하면서 간식꾸러미를 상상했다. 어쩌면 '감사합니다' 한 마디로 끝날지 모르지만 준비하는 내 마음은 기쁠 것이다.
엊그제 시험이 끝나고 한 학생이 보낸 카톡을 보고 눈물이 났다. 중학생과의 카톡에 좀처럼 인사말 같은 건 찾을 수 없는데 이를테면,
"선생님 저"
"@@@ 알려주세요"
같은 용건뿐인 톡이 대다수다. 요구를 받고 나서는 지체 없이 해결하는 신속함을 자랑했건만, 감사하다는 인사는 못 보았다. 그런데 엊그제 가브리엘(가명)이
"선생님, 시험기간 동안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저희 응원해주시고 공지사항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빨리 건강 회복하시길 바라요."
하는 톡을 보낸 것이다. 알림으로 뜬 앞부분 메시지만 보고도 눈물이 핑 났다. 나는 이렇게 작은 것에 감동하는 사람인데 참 우리 중학생들은 무정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다정한 사람인 걸.
소중한 사람들이 내게 전해온 다정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작은 눈 뭉치를 여기저기 던져야지. 하얀 눈을 꼬옥꼭 뭉쳐 던지고, 결국엔 눈 녹듯이 사라져버려도 내가 이 다정을 던졌다는 거 자체가 아름다울 거니까. 내가 받은 다정의 온기를 나는 기억할 거니까, 그 다정을 굴리는 동안 나는 행복했으므로. 굴리다 보면 우리가 함께 눈사람을 만들게 될 수도 있고.
가명은 요새 본 영화나 드라마의 이름들이다. 프랑스 작품을 자꾸 찾아본다. 다음 주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가정학습 쓰겠다고 난리일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격리를 꿈꾸는 학생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