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무사를 기원하는 마음

어둑한 밤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 부연 빛을 선사할 <밝은 밤>

by 조이아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독서모임을 통해 다시 읽었다. 4대에 걸친 여성의 서사가 매력적인 소설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도 가족이 아닌 친구가 인물의 중심을 잡아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희령이라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서술자인 지연이 희령의 연구소로 직장을 옮기면서 시작된다. 남편의 외도로 도망치듯 이사 온 이곳에서 지연은 열 살 이후 소식을 모르고 살던 외할머니와 만나게 된다. 우연한 재회와 어색한 만남으로 할머니 집을 드나들며, 자신과 닮았다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조금씩 전해 듣는데, 소설은 이렇게 지연의 현재 이야기와, 할머니로부터 듣는 1930년대 개성에서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가 만났다는 과거에서부터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증조할머니는 백정의 딸로 그 시대의 가장 낮은 사람으로 설정되었다. 백정 답지 않게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고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를 증조부(가 될 남자)는 눈여겨보았고, 마침 눈뜬 사상인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이념을 실천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그런 당찬 포부는 결혼과 동시에 사그라들고, 내가 자신의 삶을 구해줬는데 자기 아내는 왜 저렇게 당당할까 하는 의구심을 평생 내비친다. 소설 속 등장하는 기혼 여성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다 비슷한 처지인 듯하다.

양민과 결혼했어도 사람들은 증조모를 백정 취급하며 말을 건네질 않는데, 그때 증조모에게 마음을 준 사람이 새비 아주머니다. 새비 아주머니와 삼천이라 불리는 증조모의 우정은 우정을 넘어섰다고 보아도 될 터.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데, 새비 아저씨(이 소설 속 남자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다정한 남성상을 보인다.)가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가 있을 때 새비 아주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의지하던 남편에게는 소식이 없고 아이를 낳고도 까탈스러운 아이로 인해 잠도 못 자던 새비 아주머니는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것 같았다. 그때 삼천이는 자신도 일을 하는 틈틈이 아기 희자를 돌보아주고 매일 새비 아주머니에게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써서 편지를 남겼다. 두 사람의 애절한 우정은 이후에도 만났다가 헤어지고를 반복하면서 계속 이어진다.


책마다 중요한 화두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가 지난달에 읽었던 <H마트에서 울다>는 가족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번 <밝은 밤>은 가족은 아닌 타인 - 친구에게서 힘을 얻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증조할머니에게 새비가 있듯이 할머니에게는 새비 아주머니의 딸인 희자가 어린 시절 의지가 되었다. 엄마인 미선에게는 같이 은행 일을 하던 명희 아주머니가 있다. 지연에게는 엄마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도 자기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친구 지우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모녀 관계는 다 껄끄럽다. 가족은 나를 상처 입히고 나 또한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인 듯 보인다. 부부 관계도 그렇게 묘사된다. 내 소중한 사람이어서 나의 힘듦을 숨기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엉뚱한 화살로 상대를 다치게 하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직 육아로 고생하는 삼십 대 선생님은 아직 이렇게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는데 좋은 인연을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고백했다. 이제 육아의 터널에서 조금씩 헤어난 또래 선생님은 한동안 친구들을 못 만나다가 다시 만나니 너무 좋다고 털어놓았다. 오십 대 선생님께서는 여행담을 나눠주셨는데, 친구랑 해외 패키지여행을 갔는데 친구랑 온 팀은 자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모녀가 여행 온 분들께 좋겠다고 했더니, 나중에 딸이 자리를 떴을 때 어머니가 딸이랑 다니려니 너무 힘들다고 한탄했다는 이야기! 그러자 내 앞에 계신 선생님께서, 딸 둘이 있는데 추억을 만들자며 따로따로 딸이랑 해외여행을 갔노라며 그때 두 번 다 대판 싸우고 돌아오셨다고 고백하셨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옛날 생각이 났다. 결혼 전에 엄마와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홍콩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우리 둘만 간 게 아니고 엄마의 자매 그러니까 두 이모와 그 딸들과 여섯이서 한 패키지여행이었다. 나는 내 결혼을 앞두고 하는 엄마와의 여행이라는 의미가 컸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공항 면세점에서 산 독한 술을 들고 여행 첫날밤, 한 방에서 세 자매가 모였고, 우리 딸들은 각자의 방에서 보냈던가. 세 분이서 회포를 풀고 싶었던 게 확실하다. 더욱 속상했던 것은 그다음 날 여행이 엄마들의 숙취로 아주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분은 호텔에서 쉬셨고, 한분은 버스에서 내리질 못하셨고, 나는 엄마를 따라 화장실엘 자주 갔던 것이다.

어쨌거나 친구와의 여행을 위해 저축을 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큰 자극을 받았다. 바빠서 자주 연락을 못 해도 몇 년에 한 번씩 여행을 같이 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는 거다. 속으로 나도 친구를 떠올렸는데 우리도 저금을 좀 해두어야겠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로부터 그전까지는 전혀 모르던 인물에 대해, 그간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 어쩌면 <밝은 밤>이라는 제목은 지연이가 천문대에서 일한다는 것과 연결해, 어둡기만 한 줄 알았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다는 별빛의 은유인 걸까. 그가 연구하는 별은 관심 없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기만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밝은 빛을 띠는 별이라는 존재가 저 멀리에 (그것도 먼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지연이가 할머니에 대한 모르던(혹은 어둡던) 인생사를 듣고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과정은 비슷해 보인다. 그들의 삶이 고달프기도 했지만 때때로 기쁘고 아름답던 반짝이는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 빛나는 순간들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내는 게 아닐까.


새비 아주머니와 증조모가 함께 보내던 마지막 며칠, 그때 증조모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다. 새비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되갔어?"

우리가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 관계가 무척 부럽다. 내가 이 귀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내가 충분히 행복하다면 그 관계란 것은 얼마나 단단한지. 부러운 관계는 저 두 사람만이 아니다. 할머니는 자신을 정말 귀애하던 대구의 명숙 할머니에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희자에게 쉬이 편지를 보내질 못 한다. 자신의 불행을 감출 수가 없는 거다. 이런 부분이 있다.

"희자에게 글을 쓰다 보면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수록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글을 쓰는 동안 분명해졌는데, 그건 할머니의 일상을 위협할 뿐이었다."

곧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어떤가.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 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큰 사랑을 받고 있을 때에는 그들 앞에서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엄마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질 못하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모녀관계는 약간씩 뒤틀려 있지만, 조모와 손녀와는 잘 통한다. 그리고 소설의 끄트머리에 지연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자기 안에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엔 자기를 속이는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다고. 나를 속이는 일은 어쩌면 쉽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는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그때그때 내게 최선으로 보이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그게 나의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그를 속일 수 없는 것 같다. 엄마에게 그러하듯, 희자나 명숙 할머니에게 그랬듯이. 하지만 내게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큰 보물이 있을 테고, 그들이 지켜보는 사랑으로 나는 나를 보듬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밝은 밤>은 표지처럼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소설이었다.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도 담겼지만 그 순간들에도 고운 모래나 반짝이는 윤슬, 부드러운 바람과 파스텔빛 구름이 조금씩은 늘 있었다. 서로의 무사를 기원하는 마음,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마음, 그것을 연대라 해도 좋고 그저 사랑이라 해도 좋겠다.

@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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