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오전은 아들과 둘이 공부를
장면 1, 뜨끈한 바닥에 엎드려 수학 자습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이 무슨 광경인가 싶다.
장면 2, 수학 복습을 하랬더니 단 두 쪽을 한 시간이 넘게 문제집 여백에다가 흐릿하게 풀고 있다.
"땡땡아, 수학은 연습장 갖다 놓고 거기다 풀면서 해야지."
우리 집 중학생 아들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할 줄은 정말 몰랐다.
1월의 첫 토요일, 큰 아이 책가방을 세탁하려다 성적표를 발견했다.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목요일에도 함께 이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다녀왔는데 왜 안 보여준 걸까 괘씸했다. 아들은 시험날 바로바로 내게 점수를 알려준다. 이딴 식으로 조마조마하게.
- 엄마
- 나 오늘
- 수학
- **점이에요. 시간이 모자랐어요.
이처럼 투명한 성적 공개와는 별도로, 수행점수와 중간 기말고사가 합해진 성적표는 새로웠고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세네 번째 알파벳도 보였기 때문이고 특히 저놈의 수학이 그랬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될 텐데. 고등학생 때에는 수학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던데. 신년음악회에 같이 간 언니들네 애들은 밤늦게까지 과학고 입시를 준비한다던데.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고, 성적이 훌륭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속이 상했다.
이번 겨울방학은 큰아들과 데이트를 실컷 할 수 있는 때다. 작은아이 학교가 공사로 인해 긴 여름방학을 갖더니 2월에 고작 2주를 쉰다. 큰애에게 방학하기 전부터 동생이 학교 가면 우리는 도서관, 서점엘 다니자 약속을 해두었다.
일주일 간 아침마다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 가 나란히 앉았다. 내 눈에만 보이는 아들의 강박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세 시간 정도 붙어있다. 덕분에 나는 그간 못 읽었던 벽돌책도 읽고, 집에 십 년째 모셔두기만 했던 책도 읽었다. 사놓고 안 풀었던 프랑스어 책도 조금씩 진도가 나간다. 즐겁게 점심을 사 먹고 돌아와 운동을 다녀오게 하고 학원 숙제를 하고 그렇게 일과를 채운다. 그러면서 아이가 공부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새삼 알았고, 수학 문제를 푸는 속도가 많이 느리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작년 1학기 중간고사를 위해 사준 학습플래너가 새것 그대로길래 2023년 1월과 2월 달력을 써넣고, 월목표, 하루하루 무엇을 할지, 했는지를 쓰게 했다. 익숙하지 않지만 '플래너 꺼내', '이거 했다고 써' 이렇게 일일이 짚어주었더니 이제는 가지고 다니며 활용한다.
수학 푸는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여기까지만 풀고 나가자'는 말을 거의 매일 하는데, 내 바람과는 다르게 내 기다림의 시간만 길게 느껴진다. 명색이 '공포의 배고픔'으로 불리는 나는(우리 식구들은 내가 배고프면 날카로워지기 때문에 조심한다.) 사실 도서관에 도착하는 9시부터 나는 배가 살짝 고픈데 열두 시가 넘고 한 시가 되어가면 무척 힘들다. 하지만 아들한테 여기까지만 하고 나가자고 할 수는 없어서 본의 아니게 인내심을 기르고 있다. (첫날이 지나고부터는 요령이 생겨서 열 시 반 무렵 쿠키 같은 간식을 한 차례 먹고 다시 하고 있다.) 도저히 기다리기 힘들 때면 아들이 풀고 있는 문제를 노려본다. 쳐다보기도 싫은 수학 문제를 읽고 내 손으로 풀어보기도 했다. 배고픔이 수학에 대한 내 감정을 이긴 사례인데, 도움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틀린 문제의 경우 저녁때 남편이 두어 번 봐주었다. 부자가 얘기해 가며 수학 공부를 하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나는 옆에서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을 읽다가 QR코드로 음악을 듣고 악상기호도 읽어보고 했더니, 가만 보던 남편이 그런다.
"나는 음악 관련된 용어는 들어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조이아는 수학이 그러지? 안 듣고 싶고?"
"어떻게 알았어? 맞네. 딱 그거다! 난 숫자랑 수학이 보기도 싫어."
신나게 얘기해 놓고 가만히 생각한다. 우리 아들이 나를 닮았다고. 분위기 멋진 곳을 좋아하고, 밥상도 예쁘게 차려주어야 좋아하며 요새는 어떤 옷을 입을까 한참 고민하며 멋도 부리는 우리 아들. 이렇게 잘 통하는 둘이 오전 시간 내내 붙어지내서 좋기도 하지만 답답한 때가 많다. 둘째와는 다르게 씻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뭐 하나를 하라고 해도 바로 하는 법이 없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다. 머리를 말릴 때면 오른손잡이인 걸 드러내는, 어디에 드라이기를 갖다 댔는지가 너무도 티 나는 스타일이 완성되고, 준비를 마치고 기껏 신발을 신고는 등 뒤엔 가방도 안 매고 나온다. 학원 갈 때마다 핸드폰을 침대 위에 두고 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오늘 아침 주차장으로 가는 길엔 내가 챙겨준 목도리를 바닥에 질질 끌고 와서 "야!" 했더니 뒤에서 오던 유치원생 딸 둘과 아빠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도서관 휴일인 월요일 오늘은 둘이 이른 아침의 카페를 즐겼고, 교보문고에서 책의 향기에 취했다. 새해 2주가 지났을 뿐인데 올해 읽기를 마친 책이 벌써 11권이다. 두 달간의 겨울방학 동안 나와 아들 둘 다 쑥쑥 자라겠지? 먹고 앉아 있기만 해서 나의 부피 또한 자랄까 살짝 걱정이다. (어머, 미래형으로 썼지만 이미 도래해 버렸네, 남편이 읽고 놀릴까 이실직고합니다.)
딸 가진 엄마가 부럽고, 자녀가 한 명인 친구들이 부러웠다. 딸 혹은 아들이랑 둘이 훌쩍, 단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것만 같아서. 이번 방학 내게도 이런 시간이 생기는구나, 좋으면서도 왠지 단단히 묶인 기분에 목요일 하루는 서울로 홀로 탈출하기로 하고 오늘에야 큰애한테 고백했다.
"목요일에는 엄마, 서울 갈 거야. 모임이 있어. 그날 혼자 있어야 돼, 기분이 어때?"
"설레는구먼!"
웃음이 터졌다. 대단히 우렁차게 말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