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든든한 빨간 책, <완경 선언>

<완경 선언>을 읽기까지 + 읽고 나서

by 조이아

'생각의힘' 출판사에서 나온 <<완경 선언>>을 읽기에는 큰 동기가 필요했다. 우선은 즐겨 듣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이하 여둘톡)'에서 황선우 작가님이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는 걸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추천사를 썼어도 이 두꺼운 책을 읽기란 쉽지가 않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면서 추천사를 쓴 다른 작가님 이름이 다 반갑고 호감 가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줄여서 <<미.괴.오.똑.>>이라 읽는 책도 내 책장에 꽂혀 있고, 저자 하미나 작가님은 <<활활발발>>을 쓴 어딘 님의 제자이니 무조건 신뢰가 가는 분이기는 하다. '겨울 서점'의 김겨울 작가님이야 워낙 유명하고 좋아하는 북튜버이니 <<완경 선언>>이라는 책에 대한 호감도 더 높아졌으나 그래도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마음속에서 '읽고 싶기는 하지만 막상 안 읽을 것 같은 책'으로 분류하던 책이다.

내가 하는 독서모임 중에 작년에 결성된 모임이 하나 있는데, 처음 발령받은 학교의 국어 선생님들과 하는 모임이다. 대전으로 오면서 선배님들을 꾸준히 뵙기란 쉽지 않았는데, 내가 다른 지역으로 온 것 외에도 특히 한 분이 오래 미국에 계셨었기 때문이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뵈었어도 첫 학교에서의 시절을 공유하며 우리는 금세 정을 나눌 수 있었다. 작년에 두 번 만나고, 세 번째 만남에 내가 언니들께 <<완경 선언>>을 읽어보자고 제안한 것은, '독서모임이 아니면 읽기 만만치 않은 책이라서'라는 이유 외에 우리 모두가 '여둘톡' 팬 톡토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로 여둘톡 12번째 에피소드 제목은 '30년째 생리 중이라니'였다. 40대 이상 여성 톡토로로서 읽어보자고 제안을 해놓고도 괜히 어려운 책을 정했나 후회했다. 모임일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책을 사놓고는 책장에 꽂아만 두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게 된 강력한 동기는 내 몸의 이상 때문이었다. 중간고사 두 시간을 연달아 감독을 하는 날이었는데 생리혈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무척 당황했다. 주어진 역할은 겨우겨우 해냈고, 나를 보는 선생님들은 모두 얼굴빛이 왜 그러냐며 걱정을 해주셨다. 내가 왜 이럴까 싶은 마음과 함께 얼른 집에 가서 <<완경 선언>>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잡고 도망치듯 조퇴를 했다. 집에 와서 과연 이 책의 차례를 훑어보며 과다출혈 부분을 찾아보았음은 물론이다.(이런 내용이 책에 있어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시일이 흐르고 산부인과 진료도 보고, 약도 먹고, 암 예방 주사도 맞았다. 그러는 내내 몸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했다.

초경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미리 교육을 받고, 어머니가 그 과정에서 함께한다. 개인이 겪어내야 하는 부분이 많아도 가족의 축하나 지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완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나의 경우에도 다음날 학교 선배님들과 잠깐 대화를 하며 다른 분들의 경험을 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왜 그랬는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고, 갈증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은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호르몬 탓이라는데, 그래서 이게 정상이라는 건지 이상이 있다는 건지 명쾌한 답변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리고도 이 빨간 책을 탐독하듯 읽지는 못했지만 완경 이야기를 어디서 이렇게나 많이, 또 체계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읽는 내내 조금씩 위안을 얻었다.


저자는 산부인과 전문의 제니퍼 건터(Dr. Jen Gunter) 선생님으로 <<질 건강 매뉴얼>>이라는 책을 쓰셨고, <<완경 선언>> 머리말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가부장적 사회 전체가 완경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화는 정말이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중략) 거기에 더해 많은 사람들이 완경을 삶의 한 단계로 보기보다는 죽음의 한 단계로 본다.

(중략) 여성들은 내게 완경기가 얼마나 외로운지 호소한다. 완경에 관한 서사나 문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지식이라도 있어서 의학의 공백을 채워줘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다는 의미다. 기댈 곳이 없는 것이다."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 책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1부 변화 되찾기: 페미니즘으로 자신의 신체 이해하기

2부 변화를 이해하기: 완경기에 접어들 때 예상할 수 있는 일들

3부 변화를 향한 한 걸음: 호르몬, 음식 그리고 건강기능식품

4부 변화의 주도권을 쥐기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의학 서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전문용어도 많이 나오고(과학시간에 호르몬 이름 외우던 게 생각났다.) 증상이나 뒷부분에는 의약품의 효능도 나오는 책이다. 하지만 한 챕터마다 빨간 하트로 요점을 정리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솔직한 감정이 여기저기서 분출되어 있어 딱딱하지만은 않다. 월경이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지에 대한 공감이라든가, 남성과 비교해 여성의 건강이 얼마나 연구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노가 읽는 재미를 주었다.


가장 신나게 읽었던 부분은 완경에 대한 통념을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완경의 진화적 이점'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내용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고 독서모임 때에도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보통 폐경, 완경이라고 하면 여성으로서의 삶이 끝난다고들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으로 완경 이후의 할머니들이 종족의 보존에 크게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할머니들은 가족집단에게 부가가치 같은 존재였고 계속 무언가를 베푸는 선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완경을 하는 포유류 중에 침팬지는 배란을 멈춘 후 곧 죽지만(50세경), 범고래의 경우 50년 정도를 사는 수컷과는 다르게 암컷은 90세까지도 산다고 한다. 침팬지는 손주에게 관심을 갖지 않지만, 암컷 범고래의 경우 손주를 돌보며 할머니 범고래의 존재는 손주가 생존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할머니들이 손주를 돌보고 그들의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일이, 자신의 생식이나 양육에 시달린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도 손주를 볼 수 있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 같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수렵보다는 채집이 더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되었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또 우리 집도 그렇고 할머니가 워킹맘 엄마를 대신해 손주를 돌보는 일들은 여전하다. <<두 늙은 여자>>라는 책이 생각난다. 알래스카 인디언의 이야기인데, 두 늙은 여자를 버리고 떠난 부족의 생존담이다. 두 늙은 여자는 허약하고 쓸모없어 부족의 짐으로 여겨졌으나, 끝내 살아남고 나중엔 다시 돌아온 부족에게 먹을 것마저 제공한다는 숭고한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고 완경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았다. 어쩌면 나도 완경이행기에 접어든 것일 수도 있다. 산부인과에서는 이런저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기가 어렵지만 책을 통해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 다소 위안이 되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맨 앞의 선언문을 읽었다. 어쩌면 나는 이 선언문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저 두꺼운 책을 읽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완경은 질병이 아니라 진화적 적응의 결과다.(중략)

완경을 질병으로 본다는 것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질병이라는 의미이고, 나는 그렇게 조악하게 만들어진 가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중략)

완경이행기에 접어들어 호르몬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독자라면, 지금 그 단계가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증언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중략)

자신의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데 페미니즘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어야 맞지만, 우리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완경기의 몸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페미니즘적 행동은 없는 듯하다."

이렇게 멋진 선언문이 담긴 책을 읽어 뿌듯하다. 이 빨간 책이 완경에 대해 함구하는 문화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큰 힘을 줄 것이 확실하다.


제니퍼 건터, <<완경 선언>>, 김희정 안진희 정승연 염지선 옮김, 2022,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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