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사춘기를 응원하며, 면도와 거울
아들이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코 밑으로 거뭇한 것도, 턱 밑으로 뾰족뾰족 길이가 다르게 나오던 털도 보고만 있었다. 더러 남편한테 밀어야 되는 거 아니야? 묻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한번 밀면 계속해야 되니까 그냥 두라는 대답만 들었다.
설에 본 동생 내외가 “땡땡이 면도 안 해도 돼요?” 물었다. 늘 보던 얼굴이 아니라 거뭇한 수염이 거슬렸나 보다.
“그래? 이젠 좀 해야 될까?”
“매일 안 해도 되고 한 번씩 해주는 게 나을 거야.”
그러면서 면도기까지 추천해 준다. 아빠보다 삼촌이 낫네. 집으로 돌아와서 마트에 갔을 때 면도기와 여분의 면도날을 샀다. 아빠가 알려주는 면도는 욕실에서 진행되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동생도 문 앞에 서있다가 그 앞에 딱 붙어서 함께 들을 만큼 열띤 설명이었다. (실은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설거지를 하느라 잘은 못 들었지만 꽤 친절하고 상세했던 것 같다.)
면도를 하고 싸악 씻고 나온 아들은, 왠지 다른 사람 같았다. 그깟 수염이 뭐라고 이렇게 달라 보이지?
그러고 보니 우리 반 남학생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아들 만만치 않게 턱 밑에 길쭉한 몇 가닥과 거뭇한 솜털이 마스크 밖으로도 보이던 아이였다. 졸업하기 전 방과 후 교실에서 어쩌다가 민우(가명)의 맨얼굴(마스크 없는)을 보고, 같이 있던 여자아이들이 얼굴을 갸웃했다. 그 갸웃거림은 분명 감탄이었다. 예민한 나는 그 기운에 다시 민우를 보고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우 왜 이렇게 잘 생겨졌어?”
민우가 이렇게 훈남이었나 싶게 뭔가가 오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함께 웃으면서 그 순간은 지나갔지만 졸업 전에 진실을 알게 되었다. 늘 더부룩한 머리모양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던 그 털이 사라졌던 것이다.
“민우, 언제부터 면도했어? 선생님이 궁금해서 그래.”
그랬더니 거드름을 피우며
“길어지면 한 번씩 해요.”
한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언제나 있었는데! 갑자기 이 아이가 부쩍 자란 듯 느껴졌다. 어쨌거나 면도가 이렇게 사람을 달리 보이게 하는구나.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남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달리 보이지 않는다. 면도에 관해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였는데, 우리 남학생이 자기가 곧 제모를 할 거라 지금 수염이 자라서 엉망이라며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비밀이라고도 당부했고. 사춘기 남학생들에게 수염은 뭘까.
면도한 아들의 얼굴을 사흘 째 보면서도 왠지 낯설고, 진작 면도하게 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이 가리고 있었던 건 아닌데 묘하게 입매가 이렇게 생겼었나 싶고 턱선도 달라 보인다. 자기도 이런 모습이 낯선지 화장실 거울 앞에서 싱긋 웃는 모습도 자주 포착되었다.
사실 면도 후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외출 후 손을 씻고 나오거나 할 때에는 문을 열고 있는데, 그때마다 거울 속 자기를 보고 씩 웃는 것이다. 쟤가 왜 저러나, 물론 소리 내지는 않고 속으로만 말했다.
읽고 있던 책에서 사춘기와 거울 이슈에 대한 명쾌한 문장을 만났다. <<글 쓰는 딸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시몬 드 보부아르, 콜레트 세 작가에 대해 엄마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쓴 전기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편에서 시몬은 육체의 변화에 대해 엄마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인 소피 카르캥은 이렇게 서술한다.
“나 또한 몇 시간이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살피던 때가 있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과거에 혹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거울에 비추었던 내 모습들과 비교해보곤 했다. 어느 거울이 맞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내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여덟 살 때의 모습이 ‘진짜’일까, 아니면 열두 살 때의 모습일까? 사춘기 아이들을 괴롭히는 이런 질문들이 바로 철학의 밑그림이다.
오늘날 어머니들은 청소년기 아이들이 거울 앞에서 보내는 긴 시간이 일종의 자기응시라는 걸 이해한다. “나는 오늘날의 어머니가 아니었나 보다. 이 부분을 읽으니까 학교에서 만난 여학생들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수업하다 보면 여학생들의 책상 위에 열에 네다섯은 거울이 놓여있다. 스탠딩 형 거울도 당당하게 놓여있고, 눕혀 있는 작고 동그란 거울도 있다. 수업 시간에도 눈을 반짝이며 거울을 향해 눈을 맞추며 자기 앞머리를 한 번씩 쓸어내리고 쌍꺼풀은 예쁘게 있는지 살핀다. 그때의 여학생들이나 우리 아들이 화장실에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모두 사춘기의 자기 응시였구나.
내 모습이 어떤가를 살피는 일은 외모를 꾸민다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정체성과 오히려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외모를 긍정한다는 것은 자아를 사랑한다는 것과도 통할 테다. 우리 아들이 자기 얼굴을 웃으면서 본다는 것에 이렇게나 안심이 되다니.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크게 안도한다. 면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이가 컸다는 증거일 텐데. 내 마음속에서는 늘 아이 같다. 자그마하던 아이가 어느새 커서 수염을 다 깎았다. 한 발 한 발 내 품을 벗어나는 아이가 벌써 그리워 이렇게 길게 써보았다. 자기를 보고 싱긋 웃는 사춘기 아들을,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자꾸 확인하는 사춘기 딸들을 응원하고 싶다. 거울 보는 여자아이들에게 뭐라고 하지 말아야지. 자기 응시 중이로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중이로구나, 하며 이해해야겠다.
@소피 카르캥, <<글 쓰는 딸들>>, 임미경 옮김, 창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