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권하는 딸, 바깥사람

우리 가족은 느슨한 독서 공동체

by 조이아

친정엄마와 아빠가 하루 머물고 가셨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음식 냄새로 집안 공기부터가 달랐다. 아이들 표정도 설레는 저녁이었다. 갑작스럽게 오신 것치고는 가져오신 게 꽤 많았다. 전부터 만들어두셨다던 마크라메로 만든 가방, 코바늘 가방이 세 개, 오래되었으니 바꾸라며 우리 부부의 메밀베개도 새로 마련해 오셨다. 무엇보다도 냉장고가 엄마 음식으로 가득 찼다. 총각김치, 장조림, 취나물무침, 멸치볶음 등의 반찬과 냉동실에 두고 먹을 불고기 몇 팩 등. 육개장이 한솥 끓었고, 수육거리를 가져와서 하셨다는 냄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곧 있을 사위 생일을 위한 미역국거리도 가져오시고 먹거리만 한 보따리였다.

또 우리 집에 놓인 새로 놓인 물건에는 내가 빌려드린 책이 있었다. <<저주토끼>>, <<13일의 김남우>> 같은 소설, <<트렌드 코리아 2023>>, 옛날 책인 <<오래된 미래>> 까지. 이번에는 어떤 책을 가져가실까 고민하며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를 만지작거리는 아빠께 <<사피엔스>>를 먼저 읽으시라고 권하고, <<불편한 편의점>>을 떠올리며 도빵이가 다 읽으면 재미난 소설을 갖다 드리겠다고 했다.



내내 모르고 지내다가 최근에 인식하게 된, 부모님께 받은 유산이 있다. 다름 아닌 책에 대한 마음이다. 독서 업무를 맡고 갖가지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만든 게, 부모님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주 드는 거다. 일단은 책이라면 망설임 없이 사주신 태도가 그것이다. 요즘 부모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의 경험을 듣고 나서야 이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는 걸 알았다. 어렸을 때 어떤 전집을 사들인 어머님을 아버지가 야단치고 환불했던 일이 있었단다. 절약정신이 투철하신 아버님이니 충분히 그러셨으리라. 덕분에 남편은 대학원 시절까지 책이라면 교과서, 문제집 같은 텍스트, 논문 정도만 읽었다고 말해왔다. (그런 남편이 나를 만나서 요즈음에는 소설을 즐겨 읽는다. 주로 범죄나 살인과 관련한 편향된 독서이기는 하지만 많이 발전했다.) 내 방에 책이 많았던 것도 좋았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기 싫을 때면 문학전집(유명 출판사 것은 아니었지만)을 골라 읽었고, 누가 사두었는지 모를 이상문학상 수상집 <붉은 방, 해변의 길손>도 몰래 읽었다.(아직도 제목을 잊을 수 없는, 무섭고 인상적인 독서였다.) 부모님께 받은 책과 관련된 더 큰 유산으로는 부모님과 같은 책을 읽었던 경험이 있다. 중학생 때 엄마와 읽었던 <<세상의 모든 딸들>>이며 양귀자의 소설은 모녀 관계를 더 돈독히 했고, 베르나르 베르나르의 <<개미>>는 아빠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 책들은 다 내가 먼저 고른 것 같다. 엄마 생일 선물이라며 내가 읽고 싶던 책을 사서 건넸던 기억. 그러니 이 유산은 함께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에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지내던 엄마에게 나는 종종 에세이며 소설을 건넸다. 그러면 글씨가 너무 작다고 하면서도 돋보기를 쓰고 읽어내신다. 돌아오는 건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어?', '재미있게 읽었어.' 같은 짧은 감상이지만 왠지 뿌듯한 마음이었다. 엄마와 주말부부로 지내던 아빠에게도 설이며 추석 같은 명절이면, 책을 갖다 드리고 지난번 빌려드린 책을 가져온다. '서점 리스본' 정기구독을 선물했을 때엔 아빠가 다 읽은 책을 내가 다시 받아오기도 했다. 아빠에게 빌려주는 책은 물론 내가 고르는데 유시민의 책처럼 아빠 취향도 가져가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 같은 소설도 슬쩍 넣는다.(아직 안 읽으신 모양이다.)


올해 설날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맛난 엄마표 요리와 술을 곁들이는 식사에서 <<가녀장의 시대>>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가 먼저 재밌게 읽으셨고, 이런 책을 과연 아빠가 볼까 하며 갖다 놓았던 책이었다. 그런데 두 분이 모두 그 책이 재미있었다고 내가 얘기하기도 전에 줄줄 소설 속 아빠, 딸 얘길 하시는 거다. 낮잠출판사를 운영하는 작가 슬아는 딸이지만 대표이고, 출판사 직원으로 모부를 고용한다. 복희는 음식과 관련한 일을 하고 웅이는 청소, 운전 및 기타 등등(딸과 아내와 두 자매 고양이까지 여성들의 뒷바라지 일체)을 한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이렇게 사는 가족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와 아빠를 보며 나는 입이 헤벌어졌다. 청소를 도맡아 하는 아빠가 집 청소 담당인 웅이에게 공감하고, 딸이어도 돈 버는 사람이 가장이라는 것, 집안일은 월급을 받을 만한 귀한 일이라는 것에 공감했다니 우리 엄마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멋있었나. ‘모부'라는 단어부터가 새로운 이 이야기를 50년대생 엄마아빠가 재미나게 공감하며 읽었다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부모님께 받은 유산은 우리 아이들에도 이어지고 있다. 큰아이가 재미있게 읽었다는 소설을 내가 따라 읽는다. 그렇게 읽은 책에는 <<나인>>, <<스노볼>>,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등이 있고 최근에는 <<불편한 편의점>>을 큰아이-나 다음으로 남편까지 읽었고, 지금은 둘째 아이가 읽고 있다. 아주 천천히.

책을 읽고 각자 소감을 나누거나 특별한 활동을 하는 건 아니기에 가족 독서모임이라고는 명명할 수 없지만 아주 느슨하고 성긴 독서공동체 정도는 될 것 같다. 아주 큰 트램펄린에서 시차를 두고 점프하는 느낌이랄까. 누가 한번 뛰고, 내가 한번 뛰고. 다시 또 누가 옆에서 뛰면 나도 덩달아 신나 하는 그런 방방 같은 독서공동체. 그저 우리가 함께라고 느낄 수 있는 정도, 그만큼의 정서라도 우리 집만의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엄마가 마련한 저녁상이 푸짐하게 한 상 가득 차려지고, 내가 한 일은 편의점에 가서 막걸리 세 병을 사 온 게 다였다. 간 김에 큰아이를 위해 <<불편한 편의점>>에 주요 소재로 등장한 옥수수수염차도 사 왔다. 막걸리와 옥수수수염차로 잔을 채우고 '짠'하고 잔을 부딪치며 먹는 저녁은 만족스러운 공기로 가득 찼다. 우리 아이들을 키워주시며 같이 지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다.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하실 텐데 오히려 출근할 사위와 딸을 챙겨주시는 마음에 감사했다. 우리 부모님께 잘하는 남편한테도 고맙고. 너른 트램펄린 위로 감사와 사랑의 커다란 공들이 통통 튀는 밤을 보냈다. 한동안 오른쪽 귀에서 들리던 바람소리가 어느덧 사라졌다.



@ 이슬아,<가녀장의 시대>, 이야기장수


<<가녀장의 시대>> 같은 센스 있는 책을 읽은 모부가 있어서 나는 왠지 든든하다. 다만 남편이 아직 읽지 않았고 전혀 읽을 생각이 없어서 아쉽다. 이번에 새로 결성한 학교 독서모임에 추천하고 준비하느라고 전자책으로 다시 구입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꼭 읽어봤으면. 비록 살인이 나오진 않지만 구시대적인 자아가 죽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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