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
'이땡땡 학생 벌점 발급(수업 중 잘못된 행동)'이라는 문자가 온다. 한두 번이 아니라 익숙해질 만도 한데 볼 때마다 마음이 덜컥한다. 수업 중 잘못된 행동에는 과제물 불이행, 수업준비 태만, 수업태도 불량이라고 괄호가 또 있기 때문에 이 아이가 어떤 일로 벌점을 받았을까 겁이 나서다. 놀란 마음에 문자를 다시 읽으며 이성적으로 마음을 놓는다. 벌점이 1점이라는 것을 확인해서다. 큰일은 아니겠지.
요즘 들어 자꾸 벌점 문자가 도착한다. 이게 다 교복 탓이다. 코로나 시기에 중학교를 입학하고 교복은 3월 2일 단 한 번 입었었는데, 3학년이 된 올해 그 교복(벌써 품이 꽉 낀다, 바지만 쿠팡에서 다시 사주었다)을 다시 꺼내 입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여전히 체육복을 입고 등하교해도 되는 유연한 방침이지만, 아이네 학교는 정복을 착용하라며 등교 시 교복, 체육이나 스포츠 시간에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활동하게 되어 있다. 체육복을 잘 챙겨가면 좋으련만 일주일에 네 번이나 되는 그날마다 깜빡하기가 일쑤다. 미리 좀 챙겨놓으라는 잔소리 대신 요샌 가방 옆에 놓아주는데도 그런다. 나는 식구들보다 일찍 출근을 하고 남편이 아이들의 등교를 봐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는 주의라 이런 일이 잦다. 아이들은 아침 먹고 씻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후다닥 등교하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챙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 벌점만 받는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지난주에는 체육복을 윗옷만 두 벌 가져가서 벌점을 받았다.
나만 아는 아이의 허술함을 퇴근한 남편에게 일러바친다.
"오늘은 학교 끝나고 학교엘 다시 갔다 왔잖아, 학원 문제집을 놓고 와서."
"아휴, 쟤 교복 바지를 두고 와서 아까 학교 갔다 왔어. "
그런데 이렇게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하다가 나는 그만 부끄러워진다. 아침에 핸드폰 등을 놓고 가서 문 앞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오는 일이 잦은 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출근하려고 주차장에 가니 앞에 이중주차가 되어있어서 그 차에 두 손을 대고 힘을 주어 밀었다. 차에 타려고 보니 차가 안 열린다. 왜 이러지? 남의 차인가. 차키를 깜빡한 것이다. 뭔가를 놓고 다니는 우리 큰아이는 나를 닮아 그런 걸까.
사실 최근에는 물건을 놓고 가는 것 말고도 깜빡하는 일이 왕왕 있다. 어제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갔다가 혼자 놀라고 말았다. 교실 뒤쪽 사물함 뒤에는 내가 갖다 둔 책이 꽤 많다. 읽던 시사인 주간지며 채널예스 과월호 같은 잡지에 중학생 아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과 내가 즐겨 읽은 에세이, 독서모임으로 읽었던 조금 어려운 사회과학책도 꽂아두었다. 늘 제자리에 단정히 자리하고 있는 책들이 어제는 흐트러져있길래 누군가가 읽었나 하고 흐뭇해하다가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 표지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저 책이 왜 저기에? 작년에 출간되었을 때 읽고 친정집에도 다녀온 책으로, 올해 독서모임에 내가 추천한 책이 바로 저 책이다. 그런데 독서모임으로 읽으려고 보니 아무리 찾아도 집에 없는 거다. 아무래도 나도 읽고 우리 모부님도 읽었으니 되었다 싶어 중고서점에 팔았나 보다 했다. 판 것도 모르고 독서모임에 추천했구나 후회하면서, 전자책으로 다시 구입했다. 인기 많은 책이어서 도서관 예약도 꽉 차있을 만큼 예약대기가 불가했고, 우리 동네 말고 세종도서관에 예약을 해두었으나 피곤해 다녀오기가 뭣해서 전자책으로 사 읽었다. 다시 읽으면서도 물론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무리 전자책에 북마크 기능이 있어도 자주 사용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역시 종이책이 좋구나 하면서 읽었던 책이었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반 교실에 있었다니! 첫째로는 나에게 실망했다. 나의 기억력에. 둘째로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실망했다. 독서모임을 마치고 우리 반 책 추천시간에 <가녀장의 시대>를 PPT까지 보여줘 가며 소개를 했더랬다. 읽고 싶은 사람은, 선생님에게 전자책이 있으니 빌려주마 당부했었는데, 물론 아무도 빌리러 오지 않았고, '저 뒤에 그 책 있어요' 하는 아이도 없었다. 내성적인 아이들의 성향 탓일까. 책에, 내게 관심이 없는 것인가.
지난달 김환기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때였다. 부암동에 이렇게 좋은 미술관이 석파정 서울미술관 말고도 있구나 감탄하면서 고요함을 즐기고 있었다. 1층의 작품을 보다가 언뜻 프랑스 화가가 떠올랐다. 정말 좋아하는 화가로 집에 그의 포스터를 두 군데나 붙여두었고, 파리에서는 퐁퓌두에서도, 루이뷔통 파운데이션에서도 좋아라 하면서 보고 사진도 여러 장 찍었던 나였다. 그런데 그 화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다. 남편에게 그, 있잖아, 그 화가. 왜 이름이 생각 안 나지? 하면서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티스?"
"아아, 그래 맞아. 왜 마티스가 생각이 안 났지?"
의아했다. 사실 남편과 나의 이런 대화라고 한다면, 반대되는 상황은 여러 번 있었어도(맞지, 남편?) 내가 단어를 잊고 물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남편이 논리적인 설명을 못 이어나가도 그가 말하려는 게 뭔지를 내가 느낌적 느낌으로 맞힌 적이 수차례였다!
그런 내게 닥친 변화에 나는 어지럽다. 지난주에는 꽃을 꽂아두고 그 근처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데 향이 너무 좋은 거다.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아서,
"향 너무 좋아. 이거 어디서 나는 건지 알지?"
하고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가 또 단어가 생각이 안나는 일이 있었다. 진초록의 동글동글한 이파리가 어슷하게 달린, 향이 좋은 잎인데! 여러분은 아시겠는지? 남편이
"유칼립투스?"
라고 했는데, 내가 글쎄
"아닐걸?"
이라고 했다는 걸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자기는 향도 안 맡아진다는 남편 앞에서 괜히 말 걸었다고 후회를 했다. 이유인즉슨 남편은 노화를 연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늘 노화에 대해 골몰하는 남편은 우리가 삼십 대 후반일 때부터 무슨 얘기만 하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한결 같이 반응했다.
"나 여기가 아파."
"나이 들어서 그럴 거야."
"술 마신 게 아직도 머리가 아파."
"나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벌써 졸려."
"그게 다 나이 들어서 그래."
이제는 정말 인정해야 할 때인가. 서글프다. 땡땡아, 너도 나이가 든 것이냐? 나는 우리의 깜빡하는 일이 노화가 아니라 그저 너랑 나의 성향 탓이면 좋겠구나. 그리고 우리 남편은 어서 노화를 막는 약을 개발했으면 좋겠네. 자꾸 남편이 운동을 한다. 남편, 그냥 연구만 해. 내가 몹시 조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