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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

아이는 내가 아님을, <마주>를 읽고

by 조이아

”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 “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을 한 편 읽었다. 소설 속 저 문장이 어떻게 나왔는지 잘 알 것 같다.

아이들이 훌쩍 키가 크고 발도 자라면서 둘째의 사이즈가 나와 같아졌을 때였다. 한 운동화를 낡도록 신어서 신발을 새로 사주고 싶은 내 마음은 절대로 쇼핑은 가고 싶지 않다는 둘째의 마음과 평행을 이루곤 한다. 그 곤란함을 혼자만의 쇼핑으로 해결했다. 쇼핑을 가기 전에 둘째 아들의 신발을 신어본 것이다. 아이에게 익숙해진 신발은, 사이즈로는 내 것과 같았으나 발을 넣고 그 느낌이 너무 생경해 정신이 확 들었다. 발이 쑥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바닥은 푹 꺼진 듯하고 볼이 들어갈 공간은 넓어진 느낌이, 내 신발을 신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얘가 나와 사이즈가 같아도 이렇게나 다르구나 하는 느낌은, 비단 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테다.


부모들은 때로 자식을 자신의 소유인 양, 또 다른 자신인 양 여긴다. 첫째가 1학년, 담임선생님과 첫 상담했을 때 그런 기분을 처음 느꼈다. 아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게 꼭 다 내게 하는 소리 같았다. 친구들이 노는 걸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고, 조용한 편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고 교실에서 나오면서도 이상했다. 둘째 아이도 그 나이 무렵 프랑스에서 담임선생님과 상담할 때 비슷한 얘길 들었다. 아이가 조용하다며 그게 너네 나라 사람들의 특징일 수도 있지만 수줍어하는 편이다.(프랑스어를 못해서 당연히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도 내 얘기 같다고 생각하며 들었다. 내 안에도 있는 면을 아이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얘길 듣는 게 자연스러울 수는 있다. 그런데 아이의 상담을, 내 얘긴가 싶다고 여기는 건 좀 이상한 게 아닌가.

많은 부모들이 때때로 아이를 또 다른 자아로 바라본다. 소설 <마주> 속 나리와 수미도 마찬가지이다. 모녀 사이에서는 피아의 구별이 더더욱 어렵다. 엄마가 딸의 신발을, 딸이 엄마의 신발을 신을 땐 이질감이 덜할 것이다. 모녀 사이 감정의 역동은 정말이지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추석 때 한자리에 앉아 내 책 얘기를 나눌 때였다.

“엄마가 책을 잘 읽었는데, 두 번은 못 읽겠어.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너무 알겠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가 쓴 글은 절대로 슬픈 글이 아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선한 품성이 그대로더라, 이런 피드백 끝에 눈물을 보이며 덧붙인 말씀이었다. 나는 이성적으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면서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엄마 얘기를 들었다.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해도, 왠지 엄마 마음은 알 것 같다. 이렇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딸이 기특하고 안쓰러운 그런 마음이 아닐까. 우리 모녀에게도 남들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주고받는 감정이, 서로를 타인 말고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는 뭔가가 아직도 있는 듯하다.

소설 속 나리와 미주는 서로를 알아가며 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게 되고, 한동안 거리를 둔다. 결국 지난한 애증의 끄트머리에 둘은 함께 산을 넘는다. 아이는 아이의 삶을 살 거라는 깨달음의 산, 아이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두는 커다란 산을. 나에게도 필요한 험난한 여정이 아닌가 싶다. 장편 소설의 뒷부분에 놀이공원에서의 한때가 꿈인듯 서술된다. 미주와 나리가 ‘그애들’로 표현되는 둘을 쫓아가다가 놓치고

“갔어? 그애들이 갔어?”

수미가 묻자

“응, 갔어. 잘 건너갔어.”

라고 나리가 대답하는 부분. 여기를 눈시울을 붉히면서 읽었다. 아이가 결국은 나를 떠날 것이라는 암시.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이는 내가 아닌 타인이라는 것,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긴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감각하는 일은, 타인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보면 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공감이 아니겠나. 그의 신발에 발을 넣고, 그의 자리에 서보면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그런 공감을 통해 나는 자꾸만 자라고 싶다. 소설 속 나리가 미주를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책읽아웃 - 황정은의 야심한 책’에 소설가 최은미 작가님이 출연하신 방송을 듣고 소설이 궁금해졌다. (황정은 작가님 편에 소설가가 출연할 때면 꼭 그렇다. 깊이가 느껴지는 대화라서 무조건 소설이 찾아 읽고 싶어 진다.) 지난 주말 서점 ‘한쪽가게’에서 <마주>를 보고 냉큼 집어 들었다. 서점지기 님의 “이 책 정말 좋아요. ” 했을 때 느껴지던 감정의 결 덕에 책을 얼른 열어보았다. 읽는 내내 노르망디의 사과주 시드르가 그리웠다. 한 편의 곱고 단단한 이야기를 읽고, 내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최은미, <마주>,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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