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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Oct 05. 2023

술값을 내고 데려오고 싶은 표현, 시, 시

주변이 온통 시라는데 시인의 눈을 빌릴 수는 없나요?

“야, 저거 봐라, 참 예쁘다, 목련의 눈 말야, 저거 시간을 말아서 봉해둔 거 아니냐. “

고명재 시인의 산문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시창작수업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라고. 당신이 학생이던 시절, 계절은 목련이 피기 직전이었는데 한 선배가 막걸리를 마시고는 저렇게 말했단다. 그 표현이 너무 멋져서 교수님은 그 표현을 달라고 조르고는 당신이 술값을 내셨단다. 하, 시간을 봉해둔 목련의 눈이라니!

교수님은 어느 학기에 이런 시험 문제를 내셨다고 한다.

‘우리 학교 캠퍼스에서 백목련이 아닌, 자목련이 피는 곳이 어딘지 서술해 보시오. ’

나도 이런 시험 문제를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읽어 내려가다가 시인의 글을 읽고 감탄했다.

“나는 그때 ‘인문관 정문 오른편’이라든가 자연과학대 왼편 자연사박물관 옆 화단‘이라는 식으로 답을 썼는데, 정확히 십 년이 지나고 답을 알았다. 그 문제의 정답은 시, 한 글자였다. ”

시, 시였다. 시인의 산문은 온통 시로 가득 차 있다. 밑줄을 그을 요량으로 연필 하나를 들고 책을 읽다가 다 밑줄 그을 수는 없어서 귀퉁이를 접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또 접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 경험한 선물 같던 순간이 퍼뜩 떠올랐다. 생물교육을 전공하기 시작하던 대학교 2학년, 식물분류학 교수님은 어느 봄날 우리를 밖으로 이끄셨다. 캠퍼스 곳곳의 꽃을 탐색하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다양한 봄꽃을 불러볼 수 있었다. 겹벚꽃이라든가 황매화라든가 화려하고 눈길을 끄는 다른 꽃 말고, 키도 작고 꽃잎도 너무나 작은 꽃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 ‘꽃마리’라는 꽃이었는데, 이 꽃의 존재와 이름을 알게 된 순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뻤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여쁘던 것이다. 하늘빛의 꽃잎색도 곱고 가운데는 노란 것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친구들과 ‘키티꽃‘이 아니냐며 웃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그런 꽃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후부터는 어딜 가도 요 작은 하늘빛의 꽃마리가 눈에 띄었고, 볼 때마다 앙증맞은 꽃마리가 기특하고 이뻐 웃음이 나왔다. 내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졸업 후 생물전공 우리 학번의 모임 이름은 ‘꽃마리’로 정했다. 우리 모두가 어느 봄날의 딱 한 순간의 기억으로, 꽃마리에 감탄했다는 것, 그 작은 존재에 대한 애정을 몇 년 후에 알아차리는 마음, 이것도 시가 아닐까? 과학교육과 생물교육을 전공했던, 국문과 공부를 뒤늦게 하고 국어교사가 된 내가 이제와 생각하니 그렇단 말이다. 오늘 문득 떠오른 내가 경험한 시.

시는 왜 꽃이랑 이다지도 사이가 좋은 것인지. 또 하나 생각난 표현도 봄꽃과 관련되어 있다. 친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다. 벚꽃이 만발한 계절에 두 친구가 걷다가 나온 말이었단다. 문학을 공부하는 친구에게, 벚꽃이 흩날리는 지금이랑 어울리는 시를 하나 읊어달라고 친구가 청했단다. 그러자 그 문학도 청년이 하는 말,

”시가 왜 필요해? 지금 떨어지는 게 온통 시인데. “

이런 생각을 오늘 시험감독을 하면서 했다. 교실 안에서는 학생들이 시험 문제와 씨름하고 있을 텐데, 그 사투가 보이지 않는 텅 빈 복도에서 책 하나를 껴안고 복도 감독을 했던 것이다. 고명재 시인의 책은 나를 시심에 푹 젖게 했다. 저 창문 너머에는 초록색 나뭇잎이 반짝이고 열린 창문 사이로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시인의 글은 때로 내 눈가를 젖게 했다. 시험 시간 이 고요한 순간을 만끽하는 것 또한 내게는 시.

지난 6월 국제도서전에 들어서자마자 난다부스에서 구입한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는 맑고 고와서 아껴 읽고만 싶다. 그날 도서전을 나와서 만난 친구에게 술을 샀는데, 그가 바로 예에전에 벚꽃 얘기를 해준 친구니 나는 술값을 냈다. 그러나 친구는 차를 몰고 와서 와인 두 잔은 모두 내가 마셨다는 거. 내게도 술값을 내겠다며 나의 표현을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생기면 좋겠다. 내가 먼저 시를 살아야겠지? 아주 기상천외한 시험 문제로 시를 살아내면 어떨까.


@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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