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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Nov 12. 2023

혼자라는 감각, 하늘 높이

자유롭게, 홀로, 하늘 높이

내 곁에 아무도 없는 일요일 오후, 내 시간을 즐기려고 나왔다. 목적지는 읽는 사람을 위한 조용한 공간, 한쪽가게. 오늘 아침까지 임진아 작가님의 <사물에게 배웁니다>를 읽으면서 ‘좋다, 좋다 ‘ 말풍선이 내 주위에 떠다녔는데, 지난번 이 책을 골라올 때 서점지기님이 해주신 말씀이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저희 책방에 없는데, 임진아 작가님 <읽는 생활> 추천드려요.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그 말을 잊지 않고 오늘은 <읽는 생활>을 목표하고 나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며칠 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했는데, 오늘은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발과 함께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인다. ‘하늘높이’를 선곡해 차 안에서 볼륨을 높였다.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중고등학교 때 듣던 노래는 다 이렇게 부를 수 있나 새삼 내 기억력에 놀랐다. 그런데 이상하다. 애정하는 공간으로 향하면서, 마음에 쏙 드는 찬란한 하늘을 보면서 노래를 하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서정적인 기타 선율 탓인가. 오늘 나 센티하네? 이 마음은 무엇일까.


전람회의 곡을 연신 들으며 한쪽가게에 도착했다. 반가운 서점지기님과 안부를 나누고 테이블 한쪽을 차지해 임진아 작가님 <읽는 생활>에 빠져들었다. 역시 미소 지어지는 좋은 글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일렁였던 내 마음을 알았는지, 책의 초반부터 음악 얘기가 나온다. 그래, 글 쓰는 사람에게는 음악 한 곡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지. 리코더에 관한 글의 끄트머리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혼자가 되면 오늘에 대해 어떻게든 적어보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적기 어렵다면 그 마음과 가장 비슷한 노래 하나라도 꼭 찾아 트는 어른. 방금의 기분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내일은 더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자꾸만 내 안을 들여다본다”

자연스레 아까 듣던 노래가 떠오르면서 나를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전람회’의 노래 ‘하늘 높이’를 참 좋아했다. 대학가요제로 알았던 그들은 음악도 좋았고, 연세대 건축학과와, 사회학과 재학 중이라는 김동률 님, 서동욱 님 두 사람에게 반하기도 해 연대 건축학과에 가고 싶게 만들었던 분들.(못 갔다.) 여전히 동률님의 음악은 나의 최애이지만, 조금은 덜 세련되었으나 풋풋한 느낌을 주는 전람회 또한 여전히 좋기만 하다. 전람회 1집부터 3집까지 소중히 간직하던 테이프를 다시 시디로 친구에게 선물 받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었다.

그 시디로 고등학생 때 피서 가서 내 귀에 꽂고 여름밤 반복해 듣던 음악이 바로 ‘하늘 높이’였다. 강원도의 별이 가득하던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실내로 들어와 이불 위에 누워서 자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들었는데,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면 아까 보았던 밤하늘과 별이 차르르 그려졌더랬다. 그 순간 내 안에는 별똥별을 보던 감동도, 별들이 일렁이던 밤하늘도 다 들어와 있었다. 어쩐지 막막한 기분으로 어딘가에 내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했다. 내 옆엔 한 살 터울의 사촌 언니도 있었지만 왠지 그 밤, 세상 어디에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만 같았고, 그저 이 노래만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떠나가던 그 저녁에 나는 몹시 날고 싶었지

별이 맑은 하늘을 향해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는

그런 밤의 하늘 속으로

하늘로 멀리 솟구쳐 날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

오랜만에 듣는 음악으로 어린 나와 만난 기분이 들었던 걸까. 아직도 저 노래를 들으면 별이 가득했던 밤과, 나의 여리던 때,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고민들에 휩싸여 있던 내가 생각난다. 그때로서는 심각했겠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고만고만하던 고민들. 노래가 만들어질 때 ‘하늘 높이’에는 부사 ‘높이’로 쓰였겠지만 내게는 늘 하나의 명사였던 ‘하늘높이’. 이 노래는 이렇게 내게 오래 남는다.


두 아들을 내 양 옆에 착 붙이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주말이면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족이 뭉치기 어렵다. 사춘기 아들이 나랑 다니기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 시절의 힘듦이 지금은 미화되어 그립기만 하다. 일요일 오후, 혼자 차를 타고 나와 ‘하늘 높이’를 들으면서 눈물이 났던 건, 내 삶의 한 시절이 또 한 번 지나갔다는 실감이 들어서였나 보다. 젊은 나날이 지나갔 듯이, 어린아이들과의 나날도 흘러갔다. 이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이 고독의 가운데, 내가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던 그 마음을 우리 아이들도 곧 느끼겠구나 하는 자각이 더해져 더 서글펐던 것 같다. 내가 이 노래를 만났던 중학교 3학년이 딱 우리 땡땡이의 나이인데, 공부하러 스터디카페에 혼자 왔다 갔다 하는 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낼까. 요새 어떤 음악을 듣느라고 두 귀를 틀어막고 있는 걸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둘째는 지금은 친구들이랑 축구하러 간다고 신이 났지만, 또 금세 다른 기분을 느끼지는 않을까. 학교 다녀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이 어린이는 어떤 감정과 마주할까. 내가 바라보던 밤하늘의 넓고도 멀게만 느껴지던 세상을 이 아이들도 곧 차갑게 실감하겠지? 남들과 다른 나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낯섦과 먹먹함을 내 아이들도 곧 느끼겠지? 삶은 점점 아이들에게 어떤 무게를 더할 텐데. 내 중고등학생 시절의 음악을 듣다가 그때의 나를 떠올리고, 이렇게 우리 아들들 생각에 눈물이 났던 모양이다.


오늘 마저 본 영화 <우리들의 20세기>에는 빛나는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나는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 엄마에 자꾸 이입하게 되었다.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혹여 아들이 부족함을 느낄까, 자신처럼 불행할까 주변에 사람들을 두고 아들을 돕게 한다. 아들은 그걸 엄마가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것으로 느꼈을 테다. 화해는 의외의 곳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

하는 야리야리한 십 대 소년의 말 덕분이다. 엄마의 사랑보다 아이의 사랑이 때로는 크다. 아이가 헤쳐나갈 세상을 내가 먼저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영화의 끝에서 55세가 넘은 엄마는 경비행기를 조종하며 하늘을 난다.


유년 시절과 만나게 하는 노래에 얽힌 추억을, 추억이 될 지금을 임진아 작가님의 글에 힘입어 들여다보았다. 오늘 운전하는 길에 보았던 하늘의 풍경을 언젠가 또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입체적인 구름과 빗금 그어지듯 빛나던 햇살. 혼자라는 감각을 떠올리게 해주는 음악도. 아이들도 나도 개인으로서 행복하고 싶다. 나를 위할 줄 아는 사십대로 살겠다. 어쩌면 하늘 높이 날아갈지도 몰라.

(왼쪽) 전람회 1집 <하늘 높이>, (오른쪽) 임진아 <읽는 생활>, 위즈덤하우스 @한쪽가게


@ 임진아, <읽는 생활>, 위즈덤하우스, 2022

@ 마이크 밀스, <우리의 20세기>, 2016

@ 전람회, <하늘 높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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