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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Jan 26. 2024

말 한마디에 무엇을 담을까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2

교과 특성상 언어에 대해 숙고하는 편이지만 점점 더 '말하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체감한다. 다수의 학생들 앞에서 말할 때에도 주의하지만 갈등 상황에서나 갈등하는 둘 가운데 서있을 때, 학생의 상황을 학부모에게 전달할 때에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읽다가 그런 부분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부모에게 아들 시몽의 뇌사를 알리는 소생의학과 의사 피에르 레볼, 아들의 장기 이식을 권유하는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의 말하기 상황. '말 한마디로 천냥빚 갚는다'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돌이킬 수 없는 코마 상태에 대해 의사와 코디네이터는 정제된 언어로 전달한다. 둘 다 속으로는 엄청 긴장하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집중하면서(폭력적인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주의한다. 그들의 긴장하는 속내에 공감한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하는 말의 무게를 알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접근이라는 점에서 존경스러웠다.

레볼이 어머니 마리안에게 말하는 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의 말은 느리고, 사이사이 호흡이 일정하게 자리 잡는다. 말속에 자신의 육신을 새겨 넣어 그 육신이 말속에 자리하게 하여, 의사의 선고가 공감이 되게끔 만드는 방법. 그는 끌로 새기듯 말한다.) 이제 그 둘은 서로의 눈을 놓지 않는다. 서로 마주한다. 바로 이거다. 이것, 절대적 대면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리고 그건 어김없이 완수된다.'

그런가 하면 토마가 시몽 부모에게 말하는 부분엔 이런 문장이 있다.

'구두법이 언어의 해부학이자 의미의 구조임을 의식하고 있기에 스타트를 끊을 문장과 그것의 가락을 눈앞에 그려 보고, 자신이 발음하게 될 첫 번째 음절을, 메스가 살을 가르듯 적확하고 재빠르게 침묵을 가르게 될 그 음절을 꼼꼼히 따져 본다. 그는 정연하게 현재 상황의 앞뒤를 되짚어 주면서 천천히 말을 꺼낸다.'

'쾅, 대번에 토마가 자신의 목소리를 최적의 진동수에 맞췄고, 방은 거대한 마이크처럼 울리는 것 같다.'

반대로 토마는 부모의 말을 통해 그들을 가늠하기도 하는데, 아들에 대해 현재형으로 말하는지 과거형으로 말하는지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부모가 아들의 상태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언어는 사고의 과정, 마음의 이동 경로를 그대로 나타내므로.


말이란 얼마나 무겁고도 무서운 것인지. 늘 경계해야 할 말은 가까운 사이에서 오히려 큰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난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메모한 부분이 둘 있다. 하나는 숨 쉬고 있는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마리안이 남편 숀에게 건넨 말이었다. 전자는 여전히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아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노력하고 싶은 영역이다. 서핑을 하다가 돌아오는 차에서 사고를 당한 아들, 코마 상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라면 자꾸 과거를 복기하면서 원망하고 싶은 대상이 엄청 많을 것 같다. 운전한 친구나 그 부모에게도 비난의 화살은 날아갈 수 있을 것이고, 의료진을 향해 충분한 처치를 한 게 맞는지 따질 수도 있을 텐데 마리안은 그러지 않는다. 서프보드를 만들어주고 서핑의 세계를 알려준 남편, 가까운 관계이기에(비록 현재는 별거 중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가시 돋친 말을 퍼붓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텐데 마리안은 비난하지 않는다. 비록 속으로는 '할 수만 있다면 옆에 있는 그 남자를 패줬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마리안은 아들에게 첫 서프보드를 만들어준 일에 대해 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서프보드가 당신이 그 아이에게 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거였어."

다시 생각해도 난 이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 악담을 퍼붓는다면 둘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겠지. 이런 온기 있는 말 덕분에 둘은 손을 잡고 아들의 장기 이식을 결정할 수 있었으리라. 둘 사이에 사랑이 있기 때문일까?


사랑. 어쩔 수 없이 시몽의 사랑하는 대상, 쥘리에트를 떠올리게 된다. 서핑하러 나가기 직전 두 사람은 다툰다. 더 함께 있고 싶은 쥘리에트의 마음과 기다리던 최적의 파도를 타러 나가는 시몽, 젊은 연인의 마음이다. 조형 예술을 공부하는 쥘리에트는 혼자 남아 작업을 한다. 미로와도 같은 작품 '입구도 출구도 중심도 존재하지 않고 무한대의 길과 연결 통로와 갈림길, 소실점과 투시도들이 존재할 뿐인 그 복합적인 뒤얽힘의 세계'를 만들면서, 쥘리에트는 작품을 시몽에게 '우연과 조우의 공간'이라 소개했더랬다. 정밀한 미로를 집중해 만들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도 언제라도 시몽에게 도착하고 마는 자기 마음, 그 사랑을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미로라고 하면 '갇힘'이 먼저 떠오르는데 빠져나갈 곳 없는 복잡한 미로는 생(生)의 은유 같다. 개인이 주체가 되어 생이라는 미로를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경험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내는 일, 그것이 인생 아닐까. 각자에게 미로는 어떤 공간일까. 쥘리에트에게는 사랑으로 수렴되는 곳, 토마에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코디네이터로서의 육체적 삶과 노래로 영혼을 충만히 채우는 삶의 양립이 그만의 미로일 테다. 마리안과 숀의 미로는 마리안이 지핀 불씨로 둘이 함께 헤쳐나갔으면, 시몽을 떠나보낸 후 어린 루와 함께 그들만의 안식처를 만들어나갔으면 한다.

@ 마일리스 드 케랑갈,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열린책들

한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미로를 선사한 소설이었다. 나의 미로는 무엇일까. 내가 구사하는 말 안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태는 일, 나만의 다정한 미로를 오늘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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