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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Jan 26. 2024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1

표지에 푸른 파도와 붉은 심박수 그래프가 그려져 있는 프랑스 소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읽었다. 책 뒤표지에는 이렇게 쓰였다.

'한 인간의 심장, 한 인간의 생(生), 그것이 다른 생명으로 이식되는 과정을 담은 24시간의 치열한 기록'

시몽은 친구들과 서핑을 하고 난 새벽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졸음운전으로 크게 다친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가운뎃 좌석에 앉았기에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24시간 동안 의사, 간호사, 시몽의 어머니 마리안, 아버지 숀, 여자친구 쥘리에트, 이식 수혜자 클레르 등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연결된다. '치열한' 기록이라 읽기 수월하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인 정세랑 작가님의 <피프티 피플>과 비교하자면, 세랑 작가님 소설보다 강렬한 하나의 중심 사건으로 이어져있지만 오히려 조금은 헐거운 그 피프티 피플-오십 명(보다 많다)의 이야기를 더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다.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소설은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딴생각에 빠지고, 묘사가 수시로 나와 읽다가 덮었다가 길을 잃는 독서를 하게 했다. 하지만 독서모임을 한다고 다시 읽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내 생각과 경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공들여 쓰인 문장들이 다시금 보여 밑줄을 그으면서 뒤늦게 이 소설에 사로잡혔다.(심지어 길을 잃게 하는 독서를 작가가 의도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천천히 곱씹으며 읽으라고 말이다. )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라는 인물이다. 발가벗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으로 등장한 이 인물은 소생의학과 간호사로 지내다가, 노래하는 자신을 새로이 발견하고 노래를 배우고 찾아다니며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최근에는 고가의 현찰로 방울새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런 엉뚱한 인물에 대해 의아하기만 했는데, 이이가(나이는 스물아홉 살인데) 참 멋진 장면을 보여주었다.


시몽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겨우겨우 어렵게 받아들이고(당연하다) 장기 이식을 결정한다. 심장이 멈추기 전에 아들에게 들려달라는 메시지와 바닷소리(!)를 코디네이터에게 전한다. 여기저기에서(네 개의 장기를 적출한다) 이식을 위한 의사들이 도착하고 숨 가쁘게 수술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심장을 적출하기 직전, 토마는 모든 시술을 중단시킨다. 그리고 시몽의 귓가에 대고 가족들이 네 곁에 함께 있다는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부탁한 바닷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MP3 이어폰을 배를 열고 누워있는 시몽의 귀에 꽂아주고 모든 의료진들은 그 트랙이 끝날 때까지 대기한다. 토마가 보여준 순간은 이 장면만으로 끝이 아니다.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몇 차례 지나가고 다시 수술실의 토마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적출이 끝나고 의사들은 각자 대기 중인 환자들의 장기를 이식하기 위해 돌아가고, 토마는 시몽의 몸이 원래대로 복원되는지 끝까지 지켜본다. 봉합을 마치고 당직 간호사도 자리를 비웠을 때 토마는 시몽의 육체를 단장하며 노래를 부른다. 이미 심장도 없는 시체를 앞에 두고 하는 노래라니. 토마는 소생의학과의 간호사일 때에도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 곁에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를 끝까지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놀라웠다. 책 속 문장을 인용해 본다.

'생명을 위해 파열된 그 육체는 자신을 씻어주는 손길 아래에서, 노래를 실어 나르는 목소리의 결 속에서 온전성을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함에서 벗어난 일을 겪은 그 몸은 이제 평범한 죽음 속으로, 인간들의 무리로 되돌아간다.'

'그는 죽음이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는 사후의 공간으로, 불멸의 영광의 공간으로, 신화의 공간으로, 노래와 서(書)의 공간으로 그를 밀어 넣어 준다.'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타인이구나 싶었다. 다시 말하면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 인간다움이 아닐까. 살아있다는 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그런 순간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게 아닐까.

연말에 아들들과 시를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중학생 큰아들이 구성한 것, 자꾸 들여다보려고 식탁 앞에 붙여두었다.

현관을 하루에 몇 번씩 지나치면서 바닥에 쌓여가는 모래와 먼지들을 본체만체했다. 어제 오전에야 겨우 그 바닥의 모래와 먼지 등을 쓸어 닦아내다가 퍼뜩 생각했다. 어쩌면 죽음도 먼지처럼 언제나 주변에 있는데 우리는 마치 죽음이 나를 피해 갈 것처럼 못 본 척, 모른 척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도사리고 있던 죽음이 날개를 펼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허둥댈까.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는 죽음을 자주 접하며 죽음을 의식하면서 사는 자일 테다. 인간의 나약함, 그에 대한 위로의 방법을 우리보다 더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나는 토마 레미주의 행동에 삶의 의미가 담긴 게 아닐까 하며 주목했다. 그가 고액의 현금으로 산 방울새는 다른 새와 다르게 노래를 들려준다. 그냥 살아있는 것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노래하는 새라는 점에서 기꺼이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로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원제 REPARER LES VIVANTS에는 살아 있는 자가 복수형으로 쓰였다. 시몽 덕분에 새 삶을 살게 된 자들뿐만 아니라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 모두가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갈 것만 같다. 그것은 독자도 마찬가지. 소설을 읽고 난 나 또한 타인의 존엄을 세울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달리하고 싶다. 새해 무척 비장한 소설을 읽은 기분이다. 생의 무거움을 존재의 엄숙함으로 소화시켜 본다.


@ 마일리스 드 케랑갈,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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