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오독 일기'라는 제목 덕분에 쓰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고

by 조이아

김민철 작가님의 오독오독 북클럽 덕분에 읽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그의 내면을 상상하게 했다. 생소한 지명인 사르가소 바다는 자메이카의 바다로 해조류가 빡빡해 한번 들어가면 나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민철 작가님이 알려주심) 앙투아네트의 고립감과 닿아있는 공간이다. 영국의 식민지인 그곳에서 나고 자란 앙투아네트는 그 자연에 익숙하고 사람들에게도 정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원래도 딸에게 살가운 법이 없었지만 어린 아들이 죽은 후에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며 돌봄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비천한 취급까지 받는다.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던 앙투아네트는 그의 재산을 노린 정략결혼의 상대 로체스터를 경계하지만 곧 그가 주는 안정감, 다정함에 마음을 준다. 허나 로체스터로서는 차남으로서 재산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앙투아네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 접근한 거였다. 낯선 지역에서 낯선 이들에게 혐오감을 느낀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 또한 이방인으로 대하는데, 식민지에서 나고 자란 영국 혈통(트리올이라 부른다)에게는 흑인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편견에 기인한다. 영국에서 온 남자 로체스터는 그곳에서 자연도 그 지역 사람들도 도통 통제할 수가 없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환경에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고, 사람들과 자연스레 지내는 등의 주도권을 쥔 앙투아네트가 견딜 수 없다. 영국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키운 그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한 사람과 문화를 마주한 자로서 그 태도는 얼마나 게으른가. 아니 게으르다는 표현은 너무 수동적이다, 그는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자기 멋대로 바꿔 부르며 적극적으로 간사함을 드러낸다.

때마침 그에게 전해진 편지와 소문은 그가 처음 느낀 사회적 불안감에 불을 지펴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그곳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고 만다. 결혼 아니 어쩌면 재산이라는 권력을 이미 쥐었기에 다른 누구에게 주는 것마저 견딜 수 없던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를 감금하다시피 데려와 손필드 저택에 숨겨둔다. <제인 에어> 속 버사가 바로 앙투아네트다.

작가 진 리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호명되는 버사의 전사를 쓰기로 결심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지역적 배경, 문화적 배경을 지닌 입체적인 인물임을 알려준다. 식민지와 제국주의, 인종차별과 노예제도, 남성과 여성 등 몇 겹의 관계 속에서 처절하게 외면당한 인물을 독자 앞에 되살려 두었다.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방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살다가 불꽃을 마주한다.


손필드 저택에서 일하는 그레이스 풀은 '버사'를 지키는 일을 한다. 그는 "이 집은 크고 안전해서 여성에게 어둡고 잔인할 수 있는 세상으로부터 안식처가 되어줘. (중략) 무엇보다도 두껍고 우람한 벽들이 우리가 일생 동안 싸워왔지만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막아주는 곳."이라 손필드 저택을 설명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저 여자(버사를 가리킨다)에게서 내가 발견한 사실은 저 여자가 아직도 혼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거지. 아직도 사나워. 저 여자의 눈에서 그 격렬한 혼을 발견하면, 나는 저 여자를 모른 체하지 못하겠어. 내가 그걸 아니까."

그러니까 이 그레이스 풀에게도 앙투아네트에게 있는 그 격렬한 혼이 있다는 건데! 그 격렬한 혼이란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과 동시에 내 안에도 어쩌면 모든 여성에게 그 혼은 다 있지 않나 싶었다. 그저 아내로 엄마로 집안 일하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말이다.

과거에만 그런가? 요새 즐겨보는 미드는 <지니 & 조지아>, 두 주인공은 모녀 관계다. 지인에게 추천받고 보기 시작했는데, 이들도 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직 시즌 1밖에 못 보았지만) 소설 속 앙투아네트와 겹쳐 보였다. 조지아는 십대에 아이를 낳은, 외모가 출중한 여성으로 아이 둘을 키우며 여러 남편을 전전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남편이 있어야 안정적이다는 편견 속을 살며, 지니는 흑과 백의 경계에서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살아온 바 있다. 어제 본 에피소드에는 에세이 대회 진출을 가리는 수업의 한 장면이 나왔다. 규칙대로 안정적인 에세이를 쓴 대만인 남자친구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쓰고 강렬한 호소를 쓴 지나. 발표를 듣던 친구들은 모두 지니의 글이 잘 쓴 것 같다 느꼈지만 학교 대표는 남자친구로 선정되었다.

최근에 본 연극 <엔들링스>는 <패스트 라이브즈>를 만든 셀린 송 감독의 작품이다. 사라져 가는 해녀의 이야기와 미국에서 극작가로 사는 손녀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해녀의 삶도 고달프지만 하영도 만만치 않다. 이훤 시인이 연기한 '백인 남편'의 이해를 받지도 못하고 백인의 백인을 위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자리 잡기 위한 분투는 끝날 줄을 모른다. 하지만 해녀도 하영도 자신만의 내면을 가진 주체적인 여성임은 분명하다. '테레비' 보는 걸 좋아한다거나 꽃무늬 원피스를 모아둔 할머니의 옷장이 그들의 고유함을 알려주며, 하영은 내내 자신만의 '격렬한 혼'을 드러낸다.


우리에게는 여성, 피부색, 직업 같이 밖에서 보이는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보다 내면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엄마를 잃고서는 어땠는지, 어떤 공간에서 살고 싶은지 등을 로체스터가 물어보았다면. 앙투아네트가 새와 나무와 향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귀 기울였다면, 로체스터는 태양을 지닌 앙투아네트를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읽은 책에는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이유의 말이 나왔다.

"관심은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히는 일이야말로 내 앞에 있는 이를 무시하는 처사다. <엔들링스>에서는 누구나 이민자라는 메시지와 누구나 '존재'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일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내가 나로 존재하려면 내게 관심 갖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는 내 앞에 존재하는 이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가? 그럴 때에야 앙투아네트도 지니도 하영도 자기 자신일 수 있다.




@ 언급한 책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웅진지식하우스

크리스턴 로젠, <경험의 멸종>, 어크로스(시몬 베유의 말 인용)

@ 언급한 드라마

사라 램퍼트, <지니 & 조지아>, 넷플릭스 드라마

@ 언급한 연극

셀린 송 작, 이래은 연출 <엔들링스>, 대전예술의전당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