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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인 사랑의 통합

책을 읽게 하는 아들들, <싯다르타>를 읽고

by 조이아

아들 둘을 키우면서 부채 장수, 나막신 장수 엄마 이야기가 종종 생각난다. 해가 쨍쨍 나면 나막신 파는 아들을 걱정하고, 비가 내리면 부채 파는 아들 걱정을 한다는 전래동화. 여름방학을 맞이해 상장을 받아온 둘째를 칭찬하다가도 큰애가 위축될까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내가 딱 저 이야기 속 엄마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분열적인 엄마라고나 할까. 큰애는 좀처럼 운동을 하질 않고 책상 앞에 웅크리고 있거나, 침대 위에 기대고 있기 일쑤로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다. 작은애는 틈만 나면 축구하러 나갔다가 한번 나가면 올 생각을 안 한다. 얘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기를 즐겨하나 몸을 일으키면 거실에서 스텝을 밟거나 고양이의 작은 공으로 발을 놀린다. 큰애가 운동을 좀 했으면 좋겠고, 둘째는 운동을 덜 했으면 좋겠다.


두 아들에 대한 생각도 이렇게 저렇게 다르지만, 아이를 향한 내 마음도 모순적이다. 아들 둘과 방학 며칠을 지내다 보니 또 내 안의 모순을 보게 된다. 고등학생 아들은 방학을 맞아 집에서 지내더니 잠을 그렇게나 잔다. 아침까지 자는 건 그렇다 쳐도, 아홉 시 열 시에 아침을 먹여 놓으면 또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가 잠이 든다. 몇 번을 깨워도 자고 그러다 오후에야 공부를 하겠다고 스터디카페에 가거나 학원엘 간다. 밤엔 늦게 잠들고 다음날 아침엔 또 늦게 일어나고. 안쓰러운 마음도 있고, 왜 저럴까 싶기도 하다. 불 켜고 잠든 적도 있고, 오늘 아침엔 안경이 베개 밑에 깔려 있다. 자야겠다고 잔 게 아니라 그냥 잠든 것이다. 고등학생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늦게까지 공부하려는 의지는 알겠지만 참 마음에 안 든다. (늘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다.)

쟤만 저런 건 아니다. 언제였던가. 어느 새벽에 고양이 토하는 소리에 깼다가 아들 방에 갔더니, 분명히 불은 꺼져 있는데 작은애가 안경을 쓰고 자는 것 같은 거다. 안경 벗고 자~ 하면서 안경을 벗겨주는데 씩 웃는 아들. 이불속에 아이패드를 숨긴 채였다. 자라고 하고 아이패드만 가지고 나왔다. 다음날 아침 스크린타임을 확인하고 패드 비밀번호를 바꿨다. 시험 대비를 열심히 했고, 성적도 좋아서 실컷 놀아라 했던 게 나다. 그런데 게임 실컷 하게 해 줬는데 이 밤에 불 꺼놓고까지 할 일이야 또 내 안에서 생각이 불퉁댔다. (둘째는 비밀번호를 바꾼 나를 탓하진 않고 고개를 숙이고 씩 웃어주었다, 사춘기였던 작년이었다면 다르게 반응했을 거다. 다행이다. 그렇지만 그 덕에 손바닥에 자기 폰을 붙이고 다닌다.)


이 시끄러운 마음을 안고도 아들들 밥을 해먹이고 기분 맞추느라 애쓰는 방학이다. 우리 부부는 큰애 앞에서는 못하고 우리 둘이 있을 때 아이에 대한 불만을 꺼내 놓는다. 잔뜩 곤두서 있는 뾰족한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알아서 조심하는 거다. 작은애가 유독 듣기 싫어하는 머리 모양에 대해서도 많이 참다가 말을 아끼고 아껴서 한번 말했다. 아휴, 학교에서도 중학생들한테 시달리는데 집에서도 아들들 눈치를 보고 살아야 되나 답답하다.


얼마 전 친구가 <싯다르타>를 읽어보자고 했다.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아들 키우는 고뇌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며! 그러마고 책을 사두었다. 친구 덕에 알게 된 라디오 '작은 서점'을 유튜브로 찾아보고는 얼른 읽고 싶어 져서 책을 폈다. (7월 8일 김민경 편집자님 회차였고, 친한 친구 특집으로 박혜진 편집자님도 나오셨다. 유튜브 '민음사TV'에서 세계문학전집 채널을 운영 중인 두 분은 헤르만 헤세의 책을 추천하셨는데, <데미안>과 <싯다르타>였다.) <싯다르타> 속 주인공 싯다르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가 아니다. (소설 속에서 부처는 '고타마'로 나온다.) 주인공은 브라만으로 경건하고 고결하게 살다가 출가해 고행을 몸소 체험하고 고타마(이미 세존으로 불리던)의 제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이번엔 속세에서 여인을 만나고 부를 축적한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껴 뱃사공으로 살아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얼굴에서 온화한 빛이 나며 누구든 지혜를 구하고자 하던 성스러운 그에게 아들(존재조차 모르던 아들이다)이 찾아오자, 싯다르타의 마음속에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참을성 있고 기다릴 줄 아는 싯다르타라도 다른 부모의 속과 같았다. 여기에서 이미 위로를 받은 건 물론이다. 지침으로 삼고 싶은 문장도 만났다. 수많은 문장들 중에서 아들 키우는 엄마로서 되새겨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자신은 아들을 도와줄 수 없으며 아들에게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도망친 아들에 대한 사랑이 상처처럼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것을 느꼈고, 동시에 그 상처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꽃을 활짝 피우고 빛을 발하게 될 상처임을 느꼈다."

아들에게 비롯된 속상함이 어떤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지만 일단은 아이는 자신의 인생이 있으며 내가 관여한다고 달라지기는 힘들다는 걸 받아들여야겠다. 내가 대신 공부해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끌탕을 한다고 아이의 스트레스가 주는 것도 아닐 것이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만나고서야 그동안 자신 외의 사람들이 어린아이 같게 느껴졌던 오만한 태도에서 벗어나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맹목적인 성실함, 맹목적인 힘과 강인함이 있기에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아들 덕분에 사람에 대한 이해를 키웠고, 나 또한 그렇다. 나는 아들들 덕분에 학생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아들은 만만치가 않고,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며, 제멋대로니까), 학부모들과 공감할 수 있다.


물론 아들들 때문에 자기 분열적인 생각이나 모순적인 마음을 품기도 하지만, 그 마음이 모두 사랑 때문인 것을 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이런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사랑이야말로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네. (중략) 내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세상을 경멸하지 않고 세상과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의 마음, 외경심을 품고 바라볼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다네."

<싯다르타>에서 가장 마음에 담고 싶었던 부분이다.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그 첫 번째 대상은 우리 아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안경을 쓰고 잠든 아들을 보면서 뭔가를 하다가 잠든 아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열한 시까지 자다 겨우 일어났지만 밥 먹고 스카에 간다는 아들에게 장하다고 해주고. 뜨거운 볕 아래 축구를 하겠다고 나가는 아들에게 대단한 열정을 지녔다고 해주고,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할 때 좋다고 응하는 아들들에게 감사하고.

민음사 편집자님 덕분에 읽었는데 구입한 책이 문학동네 리커버였네! @ 헤르만 헤세, 권혁준 옮김, <싯다르타>, 문학동네

엊저녁엔 온 가족이 <F1 더 무비>를 보고 왔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스릴을 느끼고, 재미있었다 입모아 말하는 이런 순간들이 아직 있어 다행이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소니 헤이즈는 부와 명성보다 길 위를 질주하는 삶을 꿈꾼다. 그에겐 자기를 붙잡고 내 곁에서 안전하게 있으라는 사람보다 자기 길을 인정해 주는 이가 더 고마울 테지.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본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날 아들들에게 분열되고 모순적인 엄마 말고 너른 마음의 사랑 많은 엄마이고 싶으니까. 상처가 꽃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책을 읽으며 마음밭을 일구어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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