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계속해 저자를 기를 작정이니까_저자 기르는 법
친구들의 글을 돌려 읽을 거라고 안내하자 소란스럽다. 안 하면 안 돼요? 제 건 빼주시면 안 돼요? 꼭 해야 돼요? 글을 계획했을 때부터 돌려 읽을 거라고 예고하지 않았느냐 달래고 나눠주었다. 글은 지난 수행평가였던,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아무튼, OOO>. 좋아하는 마음은 글에도 그대로 담겨, 읽는 표정이 편안하고 좋다. 다음 문장, 다음 이야기를 향한 눈동자의 움직임마저 귀여웠다.(중학교 3학년입니다) 다만 글씨를 못 알아보겠어요라든지 맞춤법이나 원고지 사용법을 지적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한 학기를 마치는 시점, 그동안 이렇게 진지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글을 읽던 때가 있었던가. 국어 시간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이 읽기인데 말이다. 내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에 친구 글씨로, 그의 글, 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 하나로 아이들은 집중했다. 읽다가 친구 이름 혹은 글 제목을 말하기도 했다. 쫑긋 열린 귀. 누가 무슨 얘길 하나, 내 글은 누가 읽고 있을까. 마음도 산란해진다. 나는 주의를 시킨다. 내 글을 다른 사람이 읽는 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한데, 누구 글 여깄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당사자는 읽기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우리 서로를 위해 조용히 읽고 감상을 쓰자고. 그렇게 차분해졌다가 다시 술렁였다가 하는 읽기 시간은 30분가량 이어졌다. 보통 6~7편의 글을 읽게 된다.
읽는 시간에 공책에 뭐라고 썼나 살피다가 이런 감상을 만났다. <아무튼, 고양이>를 읽고 쓴 감상이었다.
‘고양이의 반대말은 저양이’
이게 무슨 소리냐 물으니, 시험 범위였던 국어의 음운 체계를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고모음, 저모음‘ 생각에 저렇게 썼단다. 국어적 변명이지 않은가. 변명에도 센스와 성의를 보이는 중학생이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기록하던 감상표를 마무리해 가로선을 긋고 그 밑에 소감을 쓰게 했다. 문장완성형이다.
-친구들의 글을 읽으니
-내 글은
-글쓰기는
-오늘 읽은 훌륭한 작품은 _______이고, 그 이유는
발표 또한 릴레이로 이었다. 반장이나 국어 코디님, 수알람 중 한 명을 지목했다. 위의 네 문장을 읽으면 자동으로 다음 발표자가 정해진다. 훌륭한 작품으로 언급된 학생이다.
-친구들의 글을 읽으니: 저마다 관심사가 달라서 신기했다든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들을 써주어 친구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든가 하는 내용이 많았다.
-자기 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는 겸손했으나 자화자찬하는 귀염둥이도 있다.
-'글쓰기는'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힘들다, 재밌었다'처럼 단순한 것도 있었지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라든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말도 있어서, 글쓰기에 대한 인식을 해보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체험을 통해 써낸 생각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훌륭한 작품에 자기 글이 호명되는 기쁨에는 친구들도 함께 반응했다. 나도 그걸 베스트로 골랐다든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한다든가 발표된 작품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그 글을 못 읽은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다시 한번 제목과 내용을 설명하고 칭찬했다. 채점하면서 밑줄 그어두었던 문장들을 읽어주기도 했다. 우수작의 저자에게 박수를 치는 반짝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서로에게 열려 있는 수업을 지향하지만 이런 장면을 만나는 건 흔치 않다. 덕분에 종이 치고도 남아있는 열띤 기운. 시작하기 전에는 이런 거 하지 말자더니, 끝나고는 교탁 주위로 와서 애들이 너무 잘 써서 놀랐다든가, 오늘 재미있었다는 말을 건넨다. 다음 시간에 또 하면 안 되겠냐 묻는 아이도 있었으니 내 마음은 일렁인다. 이 시간의 찬란함은 다 학생들 덕분, 친구가 쓴 글이기 때문에 집중했고, 친구의 말이라 경청했음이 분명하다. 그럼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 계속 쓰게 해야지. 서로에게 귀 기울이게 해야지. 국어적 모먼트를 언제까지나 이어나가고 싶다. 시험 끝났는데 수업하냐는 원망을, 반마다 듣는다 할지라도. 10반이 예외가 없다.
* 제목 사진은 <조선 민화전>에서 본 ’책가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 국어적 모먼트는 최근 읽은 서귤 작가의 <애욕의 한국소설> 추천사에서 ‘서귤적 허용’이란 용어를 보고 떠올렸다. 얼마나 재밌는지요! @서귤, <애욕의 한국소설>, 이후진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