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나날들을 갈무리하며 살기
개학하고 첫 수업, 진도 및 수행평가 계획을 안내하고 활동을 하나 했다. 친구 H가 내게 준 질문이었는데, '여름 방학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면?'이 그것이다.
나부터 고민해야 했다. 4주 간의 방학을 정리하는 세 개의 단어라. 방학하자마자 책쓰기 교육 연수 강의를 했고, 다른 학교로 강의도 한 번 갔고, 동료가 같이 하자는 연수를 수강했다. 며칠간 줌으로 실시간 원격연수도 듣고, 이틀은 온종일 집합연수엘 참여했다. 고등학생 아들도 학원 수강하느라 바쁘고, 나도 저 연수들 틈에 여행 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식구들이랑 연극을 한 편 보고 DDP 구경, 친정에서 맛난 저녁을 먹은 것이 가족의 여름 이벤트였다. 틈틈이 친구를 만났고, 함께 작가 북토크에 갔다. 그러니 내 여름의 단어는 책 관련 일이 제일 많았지만 여름방학의 세 단어를 그저 책이라고만 하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지난번 주수희 글감이었던 '도전'은 어떨까. 책쓰기 강의에 처음 도전했으니까.
1. 도전
2. 친구
이렇게 두 단어를 고르고 그다음을 정하는 건 어려웠다. 여름 동안 내 마음을 가져간 게 뭐가 있을까? 그것은 피크민? 이 게임 어플을 깔아 둔 건 진작부터였지만, 주수희 덕분에 버섯을 하루 3번 제거할 수 있다는 것, 데코 피크민이란 걸 모으는 재미, 레벨업하는 즐거움을 알았다. 서로의 레벨을 확인하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피크민을 열어 탐험을 둘러보고, 하루의 마무리로 걸음수를 확인하는 나날을 보냈으니 마지막 단어는 게임?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내 단어를 '도전, 친구, 꽃'이라 일렀다.
3. 꽃
반마다 활동을 안내하면서 나를 예로 들었다. '선생님은 어떤 도전을 했을까?' 질문하면 마라톤도 나오고(그럴 리가!) 책쓰기도 나오고 금연, 금주도 나왔다. 금연과 금주라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사람은 참 자기 기준대로 말한다는 걸 알았다. 운동이 나랑 멀다는 걸 아는 아이들은 책 썼냐 물었고, 이번엔 다른 활동을 했다고 내 방학 소식을 전했다. 친구랑 같이 한 활동에도 다 책 얘기가 나왔으니 국어교사의 정체성을 숨길 수가 없다. 마지막 꽃이란 단어를 두고, 선생님이 무엇을 했을 것 같으냐 물으니 꽃꽂이, 꽃구경 등을 말했다. '피크민 블룸'이란 게임 이야기를 하자 가벼워지는 아이들의 표정.
여러분의 방학은 어떤 단어랑 설명할 수 있는지 떠올려보라고 하고, 모둠을 만들어 이야기 나누게 했다. 질문도 하라고 이르고는, 태블릿을 꺼내 패들렛에 자신의 세 단어를 공유하도록 했다. 단어 하나당 세 문장으로 설명을 쓰라고 했더니 곧잘 써 올린다. 친구의 글에 하트를 누르고, 공감의 질문을 써보도록 했다. 좋은 질문을 한 사람에게 상점을 주겠다 하고. 손으로 쓰는 시간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조용히 글을 올렸고, 친구들의 글을 정독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시간이구나 싶었다. 서로의 여름 방학에 집중하며 궁금해하는 중학생!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 댓글을 보느라 나도 바빴다. 질문에는 답을 달도록 하고 몇 명의 방학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게 하고, 질문도 했다. 이렇게 모인 문장들은 다음에 '문장의 짜임'을 공부하고 다시 분석할 예정이라 안내했다. 마지막으로 활동의 소감을 물었다.
'친구들이 어떻게 방학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활을 발견해 신기했다' 등의 소감에 '자신의 방학을 되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었다'는 발표도 있었다. 국어 활동(듣기 말하기 쓰기 읽기)과 문장을 공부하려고 한 활동이지만,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니 뿌듯했다. 아마도 아이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한 시기를 돌아보는 일을 자발적으로 할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친구가 '방학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하는 질문을 하면서 내게 또 하나 물은 게 있다. 그동안 우리가 몇 번의 방학을 보냈겠냐고. 거의 마흔 번? 이십 년도 넘은 학교생활마다 방학은 일 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돌아왔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이냐 친구는 또 물었다. 글쎄, 작년에 아들이랑 둘이 제주도 간 거? 작년에 우리 김하나 작가 북토크 갔다가 1박 한 거? 어떤 일들이 우리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걸까? 서로 이야기했다. 가족들이랑 함께 간 모든 여행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좋았던 전시가 간직되는 것 같지도 않다. 어떤 경험이든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안다면 그런 것들이 남는 걸까. 아들이랑 둘이서 한 여행은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지만 다녀오고 아들의 사춘기가 한결 누그러진 느낌이었고, 나 스스로도 남편 없이 주체적으로 움직인 것이 힘들기도 했고 흡족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경험을 마치고 나서 내가 정리한 의미가 기억이 되어 남는 것 같다.
여름을 세 단어로 정리하면서 그 활동이나 사건에 대해 나 스스로 정리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작업이다.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자신만의 가치로 정리되어 내면에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한 시기를 떠나보내고 그다음을 건설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자기 계발을 잘하는 이들은 일주일 혹은 한 달 단위로 자신의 생활이나 작업 상황을 돌아본다. 정기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일, 돌보는 일, 설계하는 일이 맞닿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도 한 달 단위, 계절 단위로 삶을 돌아보는 일은 멀리해 왔다. 여름을 돌아보았으니, 그다음 가을, 혹은 2학기, 2025년을 어떻게 기억할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방학을 바삐 보낸 탓에 월요일에 개학을 하고 이번 주 어지러움을 느꼈다. 여전히 푹푹 찌는 무더위 탓일까. 처서가 지났으니 가을이 성큼 다가와주길 기다려본다. 나의 가을은 도전, 상상, 즐거움으로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