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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의 세 가지 소원

행복을 위한, 국어 교사의 소원이란

by 조이아 Mar 26. 2025

수행평가 기간이다. 공강 시간의 교무실, 열 반을 언제 다 채점하나 싶어서 오늘 수행한 두 반치 원고지를 꺼내놓고 색연필을 쥐었다. 채점을 한 번에 끝낼 수는 없기에 여러 번 검토할 요량으로 스윽 넘겨 보았다. 녀석들, 열심히 썼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가채점을 해보는데, 아, 내 눈. '이 글씨 안 본 눈 사고 싶네'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글씨들이 엉망이다.

학생들의 육필로 채점해야 해서 일부러 원고지를 만들어 인쇄해 주었건만 네모칸을 무시한 채로 쓰거나 너무 작게 쓰거나, 비뚤비뚤 쓴 글씨며 ㅇ과 ㅁ의 구별이 어려운 글씨 등등. 해독하는 데에는 적잖은 노력이 요구되었다. 물론 한 시간 안에 1,000자의 글을 써내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마음이 급해서 글씨체에는 신경 못 썼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교사가 채점할 걸 알고 쓴 것일 텐데 이렇게 쓸 수가 있을까. 본인은 자기 글씨를 잘 알아보려나 의심스러울 만큼 눈의 피로가 상당했다. 마음 같아서는 글씨를 못 알아보게 쓴 글에는 0점을 주고 싶으나 최하점수는 만점의 20%나 된다. 고뇌에 잠겨 있는데 눈앞이 뿌예지더니 앞에 있던 책표지 그림이 입체가 된다. 이게 뭐야. 이 책, 매직 아이 기능이 있었나? 책상 위에는 우리 독서동아리 독토리를 위한 작은 그림책 <행복을 위한 메르헨>이 놓여 있었다.

"내 당신의 미간 주름이 신경 쓰여 뛰쳐나왔네. 아무에게나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잘 들어보게."

이 소리가 어디서 나오는 건가. 요새 많이 피곤하고 눈이 충혈되기도 하더니 인공눈물이라도 넣어야겠다. 손거울을 보며 양쪽 눈에 똑똑 눈물을 떨어트리고 깜빡깜빡 정면을 응시하는데 또렷해진 시야로 손가락만 한 할아버지 형상의 것이 보인다. 뭐야, 저것은?

"그동안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게 느껴져 기특하던 차였다구. 내 특별히 당신 소원 세 개를 들어줄까 하는데."

"헛!"

움직이는 형체와 소리에 놀란 나는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그 이상한 것이 책상 위에서 펄쩍 뛰었다. 뭐야, 저거, 움직여?

"아이고, 깜짝이야! 소원 들어주려다가 놀라 죽을 뻔했네."

방금 저 소리가 그저 내 머릿속 울림이 아니었다고? 여전히 눈을 깜빡인 채 그걸 들여다보았다.

"아니, 너무 근심이 깊어 보여서 소원 들어주려고 나왔다니까."

"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외마디뿐. 저 형상을 바라본 채로 의자를 제대로 세우고 앉았다. 두 손은 모은 채로 속삭였다.

"어, 저기...... 뭐요?"

"허허, 또 말해야 하겠나? 소원을 말해봐, 이게 내 요지야. 딱 세 개만."

"아니 뭐."

나는 괜히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제가 뭐 소원이랄 게 없는데....... 갑자기 말하라고 하시니 어떻게......."

무슨 말이든 지껄이다가 책상 위 수행평가지에 눈길이 미쳤다.

"그냥 제가 만나는 학생들이 글씨나 똑바로 잘 썼으면 좋겠어요."

그때 교무실 문이 열리더니 동료가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형상은 평면의 책표지가 되었다. 나는 방금의 상황이 진짜였나 꿈을 꾼 것인가 헷갈렸다. 한동안 멍하니 있었더니 곧 종이 쳤다. 북적이는 쉬는 시간 내내 책표지를 노려보았으나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종이 쳐서 새 원고지 뭉치를 들고 수업엘 들어갔다.

수행평가를 안내하고 원고지를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이 작성하는 동안 책상 사이를 거닐며 그들을 보는데 이상했다. 분명히 내가 아는 아이들인데 그들 손에서 나오는 글씨가 죄다 반듯반듯하다. 내 입에서는 '야, 너 왜 그래? 너희들 무슨 일이야?' 묻고 싶었으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감독에만 힘썼다. 종이를 걷어서 스르륵 넘겨보는데 모두의 필체가 돋움체로 인쇄한 마냥 똑같다.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았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글씨를 잘 써왔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야, 정말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교실을 나와 교무실로 가는 내내 마음속에서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쩌지? 아파트 한 채? 로또 번호? 나도 모르게 하늘로 치솟는 입꼬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자리에 오자마자 그림책부터 살폈으나 특별한 점이 없다. 아, 또 언제 그 할아버지 나와서 내 소원 들어주지? 일단 일부터 하자고 방금 받아온 수행평가지를 들춰보았다. 자로 그은 듯한 획, 단정한 글씨는 확실히 읽기에 수월했다. 바로바로 알아볼 수 있는 이 내용. 그러나 내 마음은 곧바로 구겨져 버렸다. 돋움체로 된 오타 투성이의 글이라니 너무나 거슬리는 것이다.

"애들이 맞춤법만 맞게 쓰면 소원이 없겠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다음 수업은 수행평가가 아니라 소설 수업, 최일남의 '노새 두 마리' 도입부였다. 노새에 대해 설명하면서 암말과 수 당나귀의 잡종이라 말하던 중이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한다.

"선생님, 방금 하신 말씀 중에 오류가 있습니다. 당나귀의 수컷은 수당나귀가 아니고 수탕나귀입니다."

작년에 병아리의 수컷은 수평아리라 가르쳤던 생각이 났다.

"아, 맞네, 그렇네."

하고 대답하는데 제이가 웬일일까 싶었다. 제이는 작년 수행평가 때 '소꿉친구'를 '솝굽친구'라 쓰고 안타깝다를 '안탑갑다'라 써서 나를 놀라게 하던 아이가 아닌가.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혹시나 싶어서 이렇게 말해 보았다.

"여러분, 선생님이 가리켜준 걸 잘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선생님!"

"선생님, 가리키다가 아니라......."

저마다 말한다.

"선생님, 틀렸어요!"

헉, 내 혼잣말을 책 속 할아버지가 들었을 줄이야. 내 두 번째 소원이 이렇게 허망하게 이루어져 버리다니. 얼른 수업을 마무리하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앉자마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만큼 책을 노려보았다. 저분 또 언제 나와. 아니, 저기 저 평면인 채로 내 얘길 듣고 있는 거야? 이게 뭐야, 세 가지 소원이랬는데 이제 마지막이잖아. 마음속이 아주 복잡했다. 아파트도 로또 당첨도 얘기 못했는데, 돋움체를 획일적으로 쓰는 학생들에 맞춤법 오류를 지적해내는 학생들이라니. 작년에 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맞춤법을 가르치기는 했으나, 이렇게 완벽할 필요가 있나? 앞으로 내가 틀릴 때마다 지적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자기, 애들이 이상해."

옆 선생님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방금 수업하는데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틀렸다느니 오류가 있다느니 자꾸 그러는 거야. 심지어는 나눠준 학습지에 빨간 펜으로 체크해서 가지고 와."

"어머? 정말?"

"얘네 갑자기 왜 이래? 국어 수업을 얼마나 빡세게 했으면 애들이 이러는 거야?"

이런 얘길 나누고 있자니, 앞자리 선생님도 거든다.

"아, 저 수업하는데 뭘 잘못 말했다고 애들이 뭐라고 했어요."

정말 이게 다 내가 초래한 일들이란 말인가. 내 눈은 또다시 저 작은 그림책으로 향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로또 당첨 번호와 그 밖의 내 것일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세 가지 소원이라고 했었지. 세 가지 소원이라니. 교무실이 부산스럽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이들의 지적질을 토로하는 선생님들의 아우성.

"왜들 이래 정말?"

"그니까요, 요새 애들 맞춤법 공부해요?"

앞선생님과 옆선생님이 대화하는 가운데 앞을 보고 말했다.

"내 소원은 아이들이 인간미를 갖는 거야. 글씨가 엉망이어도 맞춤법 몰라도 상관없어."

뜬금없는 이 말에

"갑자기 웬 소원?"

"네? 선생님 많이 힘드세요?"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을 위한 메르헨>을 여전히 응시한 채였다. 아파트 한 채, 로또 당첨은 나에게 다가올 수 없던 것인가. 잠깐 동안의 혼돈은 부유한 상상 속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피식 웃음이 났다. 세 가지 소원은 왜 하필 세 가지인가. 또 아이들은 괴발새발 글씨를 써댈 테지. 우스꽝스러운 단어들도 보게 될 거야,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 다울 거니까. 나는 그저 월급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지내보겠다.



@ 에리히 캐스트너, <행복을 위한 메르헨>, 울리케 멜트겐 그림, 정초왕 옮김, 여유당



*독토리 동아리 수업으로 <행복을 위한 메르헨>을 읽고 아이들이랑 각자의 세 가지 소원 이야기를 지었다. 저마다 자기 이야기에 푹 빠져서 글 쓰는 시간을 보냈다. '메르헨'은 독일어로 동화라고 2학년 독토리가 알려주었다. 이야기 속 맞춤법 사례를 뭘로 할까 고민했더니 3학년 독토리가 가르치다/가리키다를 말하길래 ‘나 그런 거 안 틀리는데?’ 했더니, 작년에 배운 수평아리를 언급해주었다. 독토리로부터 배우는 오늘의 이야기 짓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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