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거 말고 둥근, 내 마음을 채우는 대화
최근 학부모님들과 대화할 일이 잦아졌다. 학부모 상담기간이기도 하고 원서를 작성하는 학생도 있어서 그렇다. 긴장도 하지만 대화 나누길 잘했다 싶을 때도 많고 실망할 때도 있다. 상담으로 이름 붙여진 대화는 서로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예의가 당연하지만, 출결이나 원서 작성과 관련해 중요하고도 다급한 대화를 할 땐 존중과 예의가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서로의 민낯이 드러난다고 할까. 날것 그대로의 대화는 거칠고, 뾰족한 말들은 자꾸 생각나 내 안에 더 오래 남는다. 담임으로서 수고를 들이는 일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감사에 인색할 때 섭섭했다.
주말을 맞아 한 주 간 있었던 일을 돌아보고 밀린 일기를 썼다. 내게 소중한 사람과의 대화도 아닌데 왜 이런 걸 붙잡고 속상해했을까. 내 감정은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불만과 짜증 쪽을 바라본 나를 반성했다. 내게 의미 있는 사람과의 대화, 좋았던 감정들을 간직하고 싶다. 언제나 궁금한 이들의 근황, 그의 속마음을 골똘히 들여다보아도 부족할 것만 같다.
이번 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은 설자은 시리즈 2 <설자은, 불꽃을 쫓다>이다.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정세랑 작가의 추리소설로 주인공 설자은과 목인곤의 활약이 여전히 흥미롭고 정감 있었다. 이번 책에선 새삼 신라인들의 대화가 웃기고도 짠하다 느꼈다. 이를테면 이런 곳이다. 수사를 위해 노름판에 다녀와서 자은은 인곤에게, 기뻐하는 자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인곤은 '밤을 다 써버리고 망쳐야 다시 낮을 살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말하고, 그런 걸 어찌 아느냐 묻는 자은에게
"어른 없는 어린아이가 먹고살려면 밤의 심부름꾼이 될 때가 있으니 아네. 밤 심부름꾼이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무늬를 알아봐야 하고. 어느 바다 어느 땅에 가도 반복되는 무늬가 있다네."
라고 말한다. (사람의 무늬라니, 그윽한 표현이다!) 그 얘길 들으며 자은은 인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점점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둘은 서로의 비밀을 알고 수사를 돕는 막역한 친구이지만 새로이 상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간직하고 싶은 대화란 이런 거다. 내가 없었던 그의 과거에 대해, 내가 모르는 그의 속마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발견하게 되는, 그래서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는 대화 말이다. 이런 대화는 내 소중한 이들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입과 귀가 있다고 다 통하는 건 아니다.
금요일 저녁 8시 반. 출장 간 남편 대신 아들을 데리러 갔다. 학원이 끝난 시간이었다. 기숙사 짐은 내일 찾아오자며 집으로 오는데, 거의 도착할 즈음 아들이 말한다. '학교는 안 가요?' 응? 학교는 내일 아침에 가기로 한 거 아니야? 분명히 서로 얘기하고 집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은 아빠랑은 학교엘 들렀다왔으니 거길 가는 줄 알았단다. 둘이 한 공간에서도 오해가 생길 수 있다니. '엄마는 너 밥 먹는 게 더 중요해서 얼른 저녁 줄려고 집으로 왔지' 공부할 걸 두고 왔다고 난색을 표하는 아들. 저녁 먹고 다시 학교엘 가자고, 밤 드라이브나 하자며 10시가 다 되었지만 다시 집을 나섰다. 학교에서 이불 등 짐을 챙겨서 집으로 오는 동안, 이미 두 번이나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했다고 느꼈다. 마음이 열리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한 거다. 아들에게 늘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왔지만 고등학생의 고단함과 불안을 방어막으로 두르고 귀를 막아왔나 보다. 속내를 조금씩 꺼내놓는 아들에게 고마웠다. 이번 주 학부모 상담을 한다고 그분들 이야기에 귀 기울인 만큼 아들에게 귀 기울여왔나, 그 마음을 듣고자 노력했었나 싶었다. 둘째에게도 마찬가지다. 매일 얼굴을 본다고, 같은 공간에 있다고 대화가 통하는 게 아님은 자명하다.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프로그램 가운데 이다혜 기자님과 김신지 작가님의 대화를 귀담아듣는다. 일과 관련한 다혜 기자님 책 얘기 끄트머리에서였다. 일하고 사회 생활하는 누구에게나 서포트 그룹이 필요하다고 기자님이 말했다. 나와 가치관이 비슷해서 웃고 우는 대상이 같으며, 내가 원하는 칭찬을 해주는 이들. 일이나 다른 관계로부터 상처받거나 소진된다 하더라도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고 말이다. 듣자마자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어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들과 기꺼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야말로 간직하고 자꾸 꺼내보고 싶은데, 뾰족한 대화만 들여다보던 게 후회된다.
서포트 그룹이라면 저 위에 <설자은> 책에서 '사람의 무늬'가 비슷한 이들일 게다. 나와 무늬가 비슷한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 또한 무조건적인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다. 관계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고마움을 주고받으며 인생의 달콤함을 새삼스레 알리는 것일 테다. 대화를 마칠 때면 마음이 충만해지겠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이런 이야기를 수집하며 살고 싶다. 나와 무늬가 다를 수도 있는 아들들에게도 서포트 그룹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적하고 탓하는 엄마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든 꺼내놓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이 된다면 좋겠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단단한 사람으로 서있고 싶다. 내 주변 이들이 기댈 수 있도록. 둥글고 보드랍고 힘 있는 말들을 우리 사이에 채우고서.
서포트 그룹에게 열린 문 (대전 자양동 독립서점 ‘머물다가게’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