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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진 마음을 햇빛에 말리며

새달의 마음

by 조이아

구석진 마음, 10월 30일 일력에 있던 구절이다. 그걸 보자마자 내 마음인가 싶었다. 한동안 구석진 마음이었던 것 같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말없는 두 아들 탓인지 생애주기의 변화 탓인지. 동갑인 옆자리 동료가 사십 대 중반이 되니 확실히 몸이 다르다 하는 얘기에 꽂혀 과연 그래서 그런가 씁쓸하기도 했다.

전환을 위해 머리 모양을 바꿨고 구두도 부드러운 니트도 장만했다. 출근하고 업무에 구멍 안 내고 잘 살았다. 밤엔 듀오링고도 했다. 여러 개 하고 있는 독서모임에도 성실하게 참여했고 책을 읽기는 읽었다. 하지만 나만 아는 나는 엉망이었다.

내 상태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일기장인데 이틀에 한 번이라도 쓰던 것을 간격을 벌려가며 드문드문, 그것도 짧게 기록하고 말았다. 일기장을 잘 펼치지 않는 시기. 미도리노트 일기장을 다 쓰고 다른 수첩으로 바꿔서일까, 나만의 방이 없어서일까. 일기는 자꾸 밀렸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 생각났다. 대신에 틈만 나면 게임을 열었고 그날의 도전을 야무지게 끝냈다.

일주일에 한 편 글 쓰기, 나와 한 약속이다. 이 약속은 글감을 떠올리는 생활을 가져다주었고, 만족감을 주었더랬다. 그러나 근래에는 글 쓸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글을 위해 끄적이던 수첩엔 독서모임에서 들은 얘기나 팟캐스트, 유튜브에서 들었던 작가들 말씀이 기록되었다. 내 것은 없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주는 과제를 겨우 생각해 글을 써 올렸다. 신나서 썼던 글은 인터뷰에 대한 글이었다. 기록을 보니 그렇다면 한 달 정도의 방황을 겪었나 보다.

올해 4월에 내가 책을 만들었던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책을 엮었지? 어떤 마음이 동기가 됐을까?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때의 내가 떠올려지지가 않을 만큼 작아져있었다. 올여름 내가 책 쓰면 좋은 점에 대해 떠들어댔단 말이야? 어떻게 그랬을까 그런 마음들만 일기장에 적혔다.


하지만 내 일기장엔 이런 문장도 적혀있다.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 ”

괴테의 <시와 진실>에 있는 문장이라고 한다. 나는 유튜브로 전영애 선생님 세바시를 보다가 알았다. 얼른 받아 적고 일기장에 다시 적어두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전영애 교수님은 괴테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사신다. 직접 땅을 일구고 공간을 짓는, 엄두도 안나는 일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마련한 여백서원에서 낮엔 정원을 가꾸고 밤엔 번역을 하고 글을 쓰신단다. 중년이라 기운이 없나를 운운하던 게 겸연쩍다.

11월의 첫날. 예매해 둔 조조영화를 보러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해가 반짝 났고 그동안은 안 보이던 단풍들이 오늘에야 눈에 들어왔다. 언어가 아닌 음악을 틀어놀고 운전하는 내내 생각이 흘렀다. 너무 바빴던 걸까. 추석 전에는 연휴 전에 업무를 끝내두려고 애썼고, 연휴 지나고서는 코앞에 닥친 중3들의 고입과 학부모 상담으로 쉴 새가 없었다. 시험 문제 출제와 진도의 압박에 허덕이기도 했다. 탄산음료에서 탄산이 빠지듯 내 안에선 불만과 걱정이 새어나갔던 것 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을 보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싶고 쟤들이 겪은 변화와 성장을 내게서도 찾고 싶었다. 내게서 나온 것들이 그저 투덜대는 것뿐이라면 너무 속상하므로.

지나간 10월, 내게도 즐거웠던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동료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고 노래까지 부르고 온 날. 다음날엔 반짝 기운이 나서 봄에 한 번 갔던 수영장에 혼자 씩씩하게 가서 헤엄치고 왔다. 아이처럼 신나게 놀 필요도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수영장엘 가게 하다니. 주수희세권을 산다는 글을 쓴 이후로 글쓰기 모임 주수희와 만나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서로의 글 이야기를 하며 글도 썼다. 나를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이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역시나 동네 주민인 싱수도 오랜만에 얼굴을 봤다. 전엔 내가 너무 꼰대 같이 느껴지면 어쩌나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만나자마자 활짝 웃는 싱수를 보니 금세 긍정의 에너지가 차올랐다. 사는 얘길 나누는 시간 덕분에 더 잘 살고 싶어졌달까. 내 부정적인 마음도 꺼내놓고 공감을 얻어 뭔가 정화된 느낌마저 얻었다. 긴 호흡으로 하는 책 만들기 컨설팅도 마무리 단계를 맞아 편집 및 표지 막바지 작업을 했다. 함께하는 시공간에 흐르던 열정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내게로 왔다. 내가 책을 만든 게 아니어도 뿌듯하고 흐뭇했다.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를 보고 11월의 첫날인 오늘, 이제는 게임을 끊어야겠다 다짐했다. 매달 새롭게 시작하는 미션에 초연해지기 딱 좋은 날이다. 집에 와서 일기를 쓰면서 나다움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영화의 끝에 느껴지던 연대와 공감의 마음 덕분인 것 같다. 나답게 산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경험하며 사는 일 아닐까. 의무감 말고 정말 궁금해서 읽는 책, 상영관이 적더라도 기꺼이 가서 찾아보는 영화, 내 좋은 이들과의 대화. 기록하고 싶어서 쓰는 마음. 소망이란 내 속에 있는 능력에의 예감이라고 했으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 안의 창조성이 발현될 거라 기대한다.

일기에 어두움이 쓰이기도 했지만 밝음 또한 있었음을 안다. 일기장은 나를 돌보기 위한 공간. 미래에 그 글을 읽을 나를 위해 좋은 순간들을 더 남기기로 한다. 나를 돌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련다. 내 세계의 주인은 나이므로.



@임진아 2025 일력, 어제 도착한 2026 일력

@전영애, “스스로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윤가은 감독, <세계의 주인> ; 감독님은 영화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관람할 것을 제안하십니다. 꼭 보세요.

@그만두기로 한 게임은 피크민블룸. 많이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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