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돌려 받고 싶다
책을 함부로 빌려주지 않겠다. 빌려간 책들을 받고 싶다. 한 권씩 빌려간 책들은, 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책에 대해 관심 없던 분들께 들려드린 거라 깊이 있다거나 평생 간직하고픈 책들은 아니어서, 그 책들이 없어도 괜찮다. 하지만 내가 애정을 갖고 모아놓던 책들은 자꾸 생각이 난다. 한꺼번에 비슷한 주제의 책들을 빌려준 것이다.
일단 글쓰기 책. 직장동료가 아기를 낳고 글쓰기가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마침 우리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터라, 또 그날 나의 모드가 우리 애들이 쓰던 맥포머스를 챙겨주던 터라 책 몇 권을 추천했다. 나 또한 둘째를 낳고 부쩍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어서 붙들었던 것이 글쓰기였던 것이다. 일단 조리원에서부터 나는 꿈 기록을 한다고 일반 공책보다는 작은 크기의 공책을 쓱쓱 써 내려갔다. 잠에서 깨자마자 급하게 써 내려간 글은, 다시 보면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악필이었고, 해석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읽던 책(아티스트 웨이)에서 내준 과제인, 내 안의 창조성을 키우는 방법을 고수하고 싶어서 무작정 썼었다. 이른바 '모닝 페이지'라고 하는 것으로 정말 꽤 긴 글의 두서없는 문장들을 공책에 채웠었다. 지금 다시 보아도 암호를 해독해야 할 수준의 악필이지만, 신기하게도 다시 읽다 보면 몇 년 전일지라도 꿈의 시각적 이미지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우리 집에 왔던 동료는 아기의 출산과 더불어 일을 하지 않고 있어서, 더더욱 육아에만 매달려야 했다. 게다가 그 당시 그 친구의 남편은 멀리 출퇴근 중이었기에 혼자 아이를 돌볼 일이 많았다. 그런 사정을 듣고 보니, 그 동료가 '글쓰기'를 언급했을 때, '얼마나 자기 시간을 갖고 싶을까, 얼마나 자기 자신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쩌면 당사자보다 많이 부풀었을 수도 있다. 책장까지 손님들을 이끌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인데- 내 제자들 몇(아니, 단 둘이다.)이나 사촌 동생 정도한테나 책장을 보여주며 "이 책 읽어봐." 했을 것이다. 그때는 다시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말이다.- 그날은 내가 얼마나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지를 자랑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그것과 더불어 동료의 간절함(나의 착각일지라도)에 힘입어 책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위의 내용과 같다. '나도 아기 낳고 특히 더 관심이 많아졌었다, 특히 중학생들용 글쓰기 교재를 만들기를 꿈꾸기도 했다, 이 책은 어떻고, 이 책은 이런 면에서 도움이 된다' 등. 그러다가 얘들을 가져가서 읽어보겠냐고 (내가 먼저 제안했는지, 상대가 먼저 빌려달라고 했었는지 기억을 못 하겠다.) 한 것 같다. 가져가서 보라고, 직접 써보라고. 그리고 내가 아끼는 책이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꼭 돌려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몇 권을 들려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거기 나온 과제들을 써나가던 빨간 표지의 책도 있었고, 일본 작가가 쓴 치유의 글쓰기 책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번 학기 치유하는 글쓰기 수업인 <나를 살리는 글쓰기> 반을 운영하면서 그 책들이 아쉬웠다. 예전에 내가 만든 교재로 수업을 하면서도 이것저것 더 알아보고 싶고 훑어보고 싶은 기분에 그랬다. 연말이 되어 1년을 돌아보니 더더욱 글쓰기 책의 빈자리가 아쉽다.
또 하나의 테마로 여러 권 빌려준 책은 타로 책이다. 휴직 중에 타로카드를 배우고 싶다는 동네 언니와 일주일에 한 번 우리 집에서 만났다. 그즈음이 그 언니에게 힘든 시기였다. 나는 귀국 후 외로운 시기였고, 이 기회에 타로 공부 좀 하자 싶었다. 그분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아이 문제로 인해 고민이 깊었다. 아이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보이던 그분과 타로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눴다. 일주일 카드도 뽑아보고, 하루하루 일기를 써보라고도 하고, 일주일 후에 만나면 나한테 타로카드를 중심으로 일기를 말해보라고도 했다. 그렇게 카드의 의미를 읽어나가면서 우리 집에 있는 타로 책들을 두세 권 빌려주었다. 타로카드에 관심 있는 시기니까 금세 읽고 돌려줄 줄 알았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겨울엔가 언니의 여행을 기점으로 타로 상담은 끝났고 나는 나대로 복직한다고 바쁘고, 언니는 언니대로 아이 문제로 바빴는지 둘이 만날 기회가 없었다.
타로에 관련된 책은 우리 집에서도 책장에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지만 이제 와서 아쉬운 건, 가끔씩 중학생들과 타로 카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학생과의 상담은 늘 이루어지는 건데 한 번씩 타로카드를 두고 이야기를 하면 왠지 자기 이야기를 더 잘 내보이는 기분이다. 한 번 놀러 나가면 새벽이 되어도 오지 않고, 심지어는 며칠을 친구네서 지내기도 하면서 학교에도 오지 않던 아이에게, 타로 카드를 봐준다며 "내일은 꼭 학교에 와." 약속하기도 했다. (요즘도 한 번씩 학교에 오지 않는 걸 보아, 그다지 많이 먹히진 않았다.) 외국인 엄마를 두고 있는 학생에게는 엄마와의 관계 카드를 해보며, 아이에게 무거울 수 있는 책임감을 좀 덜어주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한 번은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소외감을 느낀다'는 고민을 가진 아이와 카드를 들여다보며 내게 필요한 자세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학교 축제에 체험부스를 하나 하기로 했다. 차와 먹거리를 준비하는 옆에서 타로카드를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타로 마스터도 아니면서 타로카드를 두고 소통할 준비를 하려니, 왠지 책이라도 더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이런저런 넋두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꼭 이런다. 이것저것 내가 해놓고는 혼자 속으로 섭섭해한다. 상대방에게 그 아쉬움은 표현하지도 못 하고. 며칠 전만 해도 그분들에게 책 좀 돌려달라고 연락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빌려준 사람만 기억하고, 빌려간 사람은 자기한테 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거 아닐까? 빌린 기억도 없으면 어쩌지?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연락해서 알릴까? 어떤 말로 돌려 말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내내 연락도 안 하고 지내다가 책을 돌려달라고 하기가 그렇다. 속상한 마음이야 그대로지만, 그 사람들이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내가 기다려줘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혼자 속상해해야지 뭐.
내게 없는 책이 아쉽다는 얘기를 이렇게 쓰다 보니까 책을 빌려준 것도 나의 오지랖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먼저 나서서 '이거 빌려줄까?' 했던 것 같다. 내 앞에 있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내보임으로 책을 빌려준 것이다. 그 책의 쓰임이 그들에게 유용하다면 좋겠다.
이번 교훈은 '오지랖은 이제 그만'이 아닐까. 내가 뭐라도 되는 양 그들을 위한답시고 먼저 나서서 이러지 말자. 타로카드로 보는 성격 유형 중에서 나는 관계지향형의 인간이다. 같이 있는 사람들에 휘둘리고 팔랑귀에다가 줏대가 없는 편. 지금 내 모습이 딱 그렇다.
책장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내게 타로 책들이 몇 권 있고, 글쓰기 책은 저렇게나 많다. 필요하다면 저 책들을 들여다봐도 될 것이다. 연말을 지나면서 괜한 투정을 혼자 부렸다. 나의 모든 글은 다 혼자 속 시끄러웠다가 다시 고요해지는 결론을 향하는 것 같다.
독서모임을 하는 언니들에게 최근에 내가 읽던 책을 한 권씩 선물했다. "이거 내가 읽던 건데" 하면서. 선물 받으면 기분 좋을 에세이로 사진과 그림이 담긴 아름다운 책이었다. 읽고 좋았다는 평을 곁들이며 엽서 한 장에 마음을 담았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내가 읽던 <채널예스>며 <시사인>을 한 권씩 학생들에게 준다. 어제는 시험 끝난 특별 수업으로 주제를 '개'로 잡고 루시드 폴이 자신의 반려견 보현과 만든, 아니 보현이 작곡한 <콜라비 콘체르토>를 들었다. 이 노래의 비밀을 아냐면서. 그리고는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라는 책을 들고 가서 소개했다. 함께 쓴 작가들을 소개하고, ‘앤솔로지’도 설명했다. 동물보호단체 '카라' 얘기도 하고 김금희 작가와 장군이 이야기가 담긴 책 2-3쪽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퀴즈를 맞힌 학생에게 그것을 주었다. 2학기 들어 한 반에 소설 한 권을 주고, 릴레이식으로 돌려가며 읽으라고 했더니 책의 회전이 잘 안 되길래 이번에는 한 사람을 정해서 준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읽은 책을 학생들에게, 또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할 것 같다. 다시는 책을 빌려주지 말아야지. 산뜻한 증정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분 좋은 일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