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나에게 하는 약속
도처에 중학생들뿐이다. 그들이 내뿜는 활기와 부정적인 기운의 모순을 어찌해야 할까. 우당탕 일을 저질러 놓고 방금 자기가 한 일도 잊어버린 채, 당한 일만 떠올리는 그들. 왜 그랬냐고 물으면 횡설수설하면서 독기 어린 눈을 내뿜다가도, 너무도 순진한 눈빛으로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고백하는 그들을 매일 보며 산다. 신나게 내뿜는 당찬 기운의 내부에 가득한 고집과 편협한 시선, 또 그 안에 함께 있는 순수함. ‘무개념’으로만 표현하기에는 그들은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어쩌다가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그들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나다움을 갖게 된 게 언제부터일까. 뭣도 모르고 지내던 어린 시절을 털어내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가 자신을 갖추어 나가는 때 아닐까? 이 친구가 너무 좋아 모든 걸 공유할 정도로 친해졌다가 싸워서 내가 알려준 속내는 곧 약점이 되어 버리던 때, 얼굴에는 여드름이 나서 거울을 보기 싫어지지만 수업 시간에도 거울을 들여다볼 정도로 내 모습을 자꾸 확인하고 싶던 때, 지금의 나는 보잘것없게 느껴지지만 방송에 나오는 누구는 너무도 완벽해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환상 속을 살아가던 때가 바로 중학생 때다. 남자라고 다를까? 가만히 있으면 찌질이 같고 너무 나대면 가벼워 보이고, 어느 정도의 힘은 과시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당할까 걱정하기도 하는 중학생. 좌충우돌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 시기인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옛 선생을 찾아와서 너무도 번듯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러 오면, ‘얘가 그 말 안 듣던 그 애 맞나’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흡족하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 주인공 은희는 중학교 2학년이다. 마음에 꽂혔던 장면이 몇 개 있는데,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은희가 거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뛰던 장면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감독이 ‘은희가 춤추는 장면’이라고 표현하던 그 부분이 내게는 화를 어찌할 수 없어서 분출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중학생의 내 모습을, 은희가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영지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 끄트머리에 ‘제 삶도 언젠간 빛이 날까요?’라는 질문이 아팠다. 도무지 나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던 그 시절을 나도 지나왔으므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내 모습이 탐탁지 않다.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은희와 공명하면서, 그 끝에서 은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도 내가 싫었어, 하지만 지금은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 하고 싶은 일과 되고 싶은 모습을 나의 시간 속에 넣는다. 내가 마음에 드는 옷차림을 고른다. 출근할 때에는 프랑스어를 반복해 듣고 퇴근길에는 책 관련 팟캐스트를 듣는다. 자기 전에는 책을 읽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고 반납한다. 시사잡지 한 권을 구독한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유튜브를 틀어 놓고 요가를 한다. 주말에는 걷기와 달리기를 한다. 일요일 밤에는 프랑스어 공부하는 세 명이 카톡으로 일주일치 공부한 것을 테스트한다. 한 달에 한 번 쓰던 것을 일주일에 한 편 글쓰기로 최근에 수정하였다. 좋은 영화나 공연을 틈틈이 검색해서 그 달의 일정에 추가한다. 학교에서의 나는, 학생들에게 말하기나 쓰기 수행 과제를 내줄 때 내가 먼저 해보고 시범을 보인다. 독서행사를 기획하거나 진행하는 일을 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수시로 아이들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말을 건네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집에서는 어린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집 아이들과 다른 가족 아이들을 모아 한 달에 한 번 독서모임을 한다. 남편을 따라 가벼운 장난을 하고, 자꾸 산책을 하자고 끌고 나가 쫑알쫑알 대화를 나눈다.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말은 참 서글프기도 하다.
원하는 모습만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책을 냈다고 하면 질투가 먼저 난다.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 책상에 앉아서는 단어 찾기보다 인스타그램을 더 오래 할 때가 많다. 인스타그램 속 사진들에 내게 없는 것들이 돋보여 부러워한다.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는 교사이고 싶지만 간혹 듣지 않고 판단하기도 한다. 내가 할 일에 치여 내 아이들에게 쏟는 시간을 아까워하기도 한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를 마련한다. 한 해가 저물 때쯤 내 다이어리는 빽빽하게 채워진다. 그 안에 담긴 약속과 다짐, 성취의 기록 따위를 나는 소중하게 여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기록은 생리주기 이외에는 별로 없다. 겨우 ‘우울함’ 정도의 단어로 축소되어 버리는 내 부정적인 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순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른 아침 달리기를 하다가 과거의 내 모습이 생생히 다가온 경험이 있다. 물소리를 듣고, 들꽃들을 보다가 문득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는 말이다. 자줏빛 교복을 입고 흰 양말에 검은색 구두를 신고 구두코를 보며 늘 다니던 길을 걷던 중학생의 나. 마치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 그 아이가 계속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계속 달릴 수가 없었다. 찬찬한 걸음으로 걸으면서 ‘그 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조금은 불안해하면서 진지한 모습으로 지내던 그 아이는 어떠했지?’ 생각하자 내 안에서 뭔지 모를 뜨거움이 솟구쳤다. 나는 그때 그 아이에게 왜 그렇게 차가웠을까.
중학생 때야말로 우리 안의 모순을 마음껏 드러내는 시기가 아닐까? ‘중2병’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때로 자유로워 보인다.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시기이고, 뇌가 만들어지는 때라서 자기가 한 행동을 본인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이론에 기대어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된다. 그런데 어른이라고 다를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 나를 더욱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실감한다. 내 안에 있는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모두 나다. 내 안에는 열네 살짜리의 나도 있고, 스무 살짜리의 나도 있다. 그 모든 나를 아우르고 싶다. 좀 더 실수하고 더 자유롭고 싶다. 두려움과 불안을 내던지고 싶다. 내 안에 있는 어둡고 어설픈 부분들을 모두 따듯하게 안아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야외에서 요가를 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마라톤에 도전해서 상기된 얼굴로 결승 지점에 도착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찬란한 햇빛과 흰 구름을 마주하며 유유히 헤엄치는 그 고요함을 상상한다. 그럴 때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를 마주할 때마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