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물들_꽃] 자연이 주는 위안
전쟁이 한창이고 기름값이 올라도 산에 들에 나무들은 어김없이 꽃을 피웠다. 나무에는 새잎이 돋아나 연둣빛이 돌고, 분홍 벚꽃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프로젝트 해일메리를 보셨는지. 우주선 한쪽에 있는 위안구역에는 다양한 화면이 제공되는데 그레이스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대상은 온통 자연이다. 자연이 주는 위로는 나이가 들수록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한결같아서, 늘 새로워서.
집 앞이 벚꽃길이라 지난 주말 내내 상춘객들로 붐볐다. 사진을 찍는 연인, 아장아장 아기를 앞세워 걷는 가족들, 반려견을 동반한 이들까지. 길어야 보름간 화사한 무드를 만들어주는 벚꽃. 금세 떨어져서 아쉽지만 그 찰나 덕분에 소중한 이들과 만나 같은 속도로 걷고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 꽃나무 옆에서 이쁜 표정을 짓고 바라보는 건 카메라지만, 꾸미지 않은 표정을 드러내는 건 자연 앞이다. 고운 빛깔의 꽃을 들여다보고 이어지는 벚꽃길에 탄성을 내지르는 얼굴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떨어지는 꽃잎이 아쉬웠다.
봄이 이렇듯 모든 세대에게 자연의 축복을 불어넣고 있는데, 유독 중학생에게만은 춘곤증 하나로만 작동하는 듯하다. 수업 시작할 때 주말에 꽃놀이 다녀왔느냐 물었더니 꽃놀이요? 되묻던 아이들. 학교 근처가 산이라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연두색, 분홍색 온통 파스텔 톤으로 붓질되어 있는 봄빛을 볼 수 있는데도.
친구 사랑을 주제로 한 학급별 사진 콘테스트에 어떤 사진을 찍을까 회의를 하던 날이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어디서 찍을까 묻는데 별 의견이 없는 우리 반 아이들. 운동장 다홍빛 꽃나무가 예쁘던데 거기가 어떻냐는 내 말에, 아이들이 어리둥절한다. 무슨 나무요? 왜 급식 먹을 때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 말이야. 저기이! 어떻게 설명해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걸까. 무심해도 너무 무심하다.
봄꽃들이 존재감을 내뿜는데도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건, 학생들의 생활에 여유가 없어서일까. 다음 주 동아리 시간에는 야외학습을 해야겠다. 꽃이든 하늘이든, 혹은 축구하는 친구들이건 관심 갖고 보면서 묘사하라고. 우리는 글쓰기 동아리니까. 자연이 주는 기쁨이 소중하다는 걸 좀 더 아는 내가 먼저 호들갑스럽게 꽃향기가 난다느니, 꽃색깔이 어쩜 이렇게 예쁘냐느니 과장해야지. 이렇게 떠먹여주면 중2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말랑해질지도.
일주일에 한 번 쓰는 우리 반 공감수첩에, '내가 아는 봄꽃'을 써보라 했던 아침. 중2들은 두 개, 많이 쓰면 네 종류의 꽃이름을 썼다. 제일 많이 쓰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부추겼더니 꽃이름을 열 개나 쓴 중2가 나타났다! 비록 국화며 해바라기까지 여름꽃 가을꽃을 가져다 썼지만. 쓴 게 어디냐며 칭찬. 아이들의 수첩마다에 아이 이름+꽃을 넣어 한 문장씩 써주었다. '조이아꽃이 있어서 우리 반이 환해!' 같은.
자기들이 꽃이라는 걸 믿지 않는 중2들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어떤 포즈로 찍을 건지 의견을 내지 않고 있으니 내가 제안해야겠네. 다 같이 꽃받침 하고 찍자고. 어디서 찍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 아이들이 이미 꽃이니까. 그래도 꽃나무 옆이 좋겠다. 무표정할 중2들의 얼굴도 활짝 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