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사물들] 식어버린 마음을 다시 굽는 일

[빵] 빵처럼 다시 데워 쓸 수 있는 마음이라면...

by 빛별

빵지순례객들이 길게 줄을 서는 유명한 빵집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곳의 아침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유혹으로 시작됐다. 심신이 지친 평일 저녁 퇴근길에도, 부스스한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서는 주말 아침에도, 허기진 마음을 다정하게 부풀어 오르게 하는 그 냄새를 따라 문을 열면 갓 구워진 빵들이 쟁반 위에 몽글몽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무해한 귀여움에 반해서 한동안 베이킹 유튜브에 푹 빠져 지냈다. 오븐 속에서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르는 반죽을 보며, 누군가 나를 저렇게 멋지게 빚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누구보다 말랑한 존재가 되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잔뜩 부풀어 오르고 싶었다. 고소한 향기를 내뿜으며 데일 듯한 열기를 견뎌내는 그 늠름함은 또 얼마나 근사해 보이던지.


하지만 슬프게도 모든 빵은 오븐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제 생기를 조금씩 내어준다. 푹신했던 결 사이로 수분이 빠져나가고, 사방을 압도하던 짙은 버터 향도 공중으로 흩어진다. 올해의 빵집이 문을 연 지도 어느덧 세 달. 진열대 위에서 오랫동안 선택받기를 기다린 바게트처럼, 내 안의 어떤 문장들도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하다. 화면 속에서 저마다 빛나는 사람들,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이들도 분명 나와 같은 재료로 시작했을 텐데, 지금 나는 왜 이리도 푸석하고 거친 지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입천장이 까질 듯 거친 일상을 억지로 씹어 넘기다 보면 내 안의 온기가 너무 빨리 식어버렸음을 문득 깨닫는다. 이제는 굳어버려서 다시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다짐들을 난감하게 바라보다가, 일단 남은 빵을 비닐에 꽁꽁 싸매 냉동실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다. 이건 포기라기보다는, 차가운 동면을 통해서라도 잃어버린 풍미를 조금이나마 지켜내고 싶은 뒤늦은 안간힘이다.


그렇게 잊힌 줄 알았던 빵을 다시 꺼내게 되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허기가 찾아오는 어느 오후다. 꽝꽝 얼어붙은 덩어리를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타이머를 돌린다. 180°C의 뜨거운 공기가 빵을 어루만지는 동안, 잊고 있었던 고소한 냄새가 다시 피어오른다. 하지만 단순히 다시 굽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에어프라이어에서 막 꺼낸,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빵 위에 차가운 버터 한 조각을 올린다. 스르르 녹아내린 버터가 빵의 거친 표면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그 위에 달콤한 잼 한 스푼을 덧바르면 비로소 빵이 온전히 부활한다.


한 번 식어본 사람만이, 그리고 그 차가운 정적을 견뎌본 사람만이 다시 뜨거워졌을 때의 소중함을 안다. 처음의 서툰 열기가 아닌, 한층 단단해진 열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뜨거워지기로 마음먹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호한 채찍질보다 거칠어진 마음을 다독여줄 버터 같은 휴식, 혹은 퍽퍽한 일상에 달콤함을 더해줄 잼 같은 다정한 위로가 아닐까. 그 작은 보탬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식어버린 마음을 온전히 보듬고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미완의 다짐과 서툰 소망들을 잔뜩 구워내고, 남은 것은 기꺼이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둔다. 언젠가 삶이 퍽퍽해질 때 다시 꺼내 구울 수 있도록. 비록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실패작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한때 무언가를 뜨겁게 열망했던 나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마음들이 언젠가 다시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이, 다시 시작하고 싶은 어느 날 나를 일으켜 세울 든든한 힘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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