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황금을 서로에게 맡기는 일
나의 외로움과 함께 걷다가,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답장할 메일이 있고, 내 소식을 반가워할 꼬맹이도 있다. 꼬맹이가 아니라 세상의 무거움을 진 고3. 만나고 나면 내가 뭐라고 이렇게 날 좋아해 줄까 하는 마음에, 내가 더 잘살아야겠다 마음먹게 되는 아이.
복직하고 내 직책에 어깨가 무겁던 나날이었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단 하나의 업무, 독서교육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동아리를 구성했다. 책임지고 해내야 할 일만으로도 내 몫을 다 할 수 있을까 싶은 신규업무를 맡았지만, 자진해서 뭔가를 하기로 한 데에는 그즈음 자꾸 내 등 뒤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동료 교사로부터 2학년 H라는 학생이 참 공부도 잘하면서, 성격도 좋고, 봉사며 운동이며 적극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참한 학생이 다 있다니 하고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1학년 부장이면서 1학년 전반의 수업을 들어갔는데, 그 해에는 이상하게도 국어과 교사가 둘이면서 순회교사도 받아서 2학년 한 반의 문법 부분 수업만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시간 들어가는 수업에서 H를 만났다. 나는 하던 대로 자기소개를 하는 두세 시간으로 국어수업을 시작했고, 장차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되고 싶다던 H는 눈에 띄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복도나 계단에서 자꾸만 내 등 뒤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아이들 말로는 H가 선생님 좋아하는데 부끄러워한다고 했다. 수업에 들어가면 칠판 구석에 하트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학급 반장을 하던 H를 교무실에서 만나면, 아이가 자꾸 다른 데를 바라보며 얘기를 해서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의자를 뱅뱅 돌려가며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다.
어느 날인가는 H가 나하고 동아리도 같이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 얘기에 힘입어 나는 독서동아리, 그러니까 기존의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하는 독서동아리 외의 또 다른 독서동아리를 만들었다. 2학년 다섯 명으로 구성된 '책더하기'는 교육청의 지원을 받고 우리끼리 혹은 다른 학교와 연합하여 다양한 책 체험을 했다. 정규시간 외에 시간을 내어 서점에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갔다. 그럴 때마다 H와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때에도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하지는 못하고, H는 자꾸 딴 데를 보면서 얘기를 했지만, 나란히 서서 혹은 앉아서 얘기를 나눌수록 아이가 꿈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든가 야무지게 자신의 학습을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는 모습이 멋졌다.
한 번씩 메시지가 와서 보면, H의 하트였다. 어딘가에서 하트를 볼 때마다 - 그게 비록, 플라스틱 음료병의 동그라미가 찌그러져서 만들어진 하트일지라도- 내게 사진을 찍어 보낸 거였다. 내게 까르르 웃음소리를 주고, 하트를 주고, 심지어는 칠판에 판서한(죄다 문법 내용일 뿐인!) 내 글씨도 찍어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미소가 지어지면서 기분이 좋다가도 이 아이가 왜 그럴까 의아했다. 문학 수업을 하지도 못했는데 내가 아주 감동적으로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국어지식을 엄청나게 많이 전해주지도 않았고, 특별히 H를 아껴서 진로에 관한 특별 상담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정갈한 글씨의 스승의 날 편지도 받았었는데, 우리가 만난 지는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H와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향해 가면서 나는 로버트 존슨의 <내면의 황금>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아이가 내게 자신 내면의 황금을 맡겼구나 생각했다. 내게서 좋은 면만 보고, 닮고 싶은 부분만 골라 보며 마음을 키워가고 있는 듯했다. 그 좋은 게, 죄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은 모르고! ('내면의 황금(Inner Gold)'은 융 심리학자 로버트 A. 존슨의 책에 나와 있는 개념으로, 인간 내면의 선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보통 연애를 시작하는 초기 우리는 상대에게 좋은 면만 보는데, 이를 책에서는 내면의 황금을 상대에게 맡긴다고 표현했고, 자기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정신적 역동으로 본다.)
H는 종종 우리가 만난 지 몇백 일 같은 메시지도 보내줬다. 여전히. 올해에 우리는 1500일이 넘었다고 했던가.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어서 나는 나를 긍정할 수 있고 더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는 내가 선물했던 작은 노트에 매일매일의 편지를 써 들고 나타났다. 아, 그런 건 내가 고등학생 때 하던 행동인데! 절친도 아닌 내게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주다니. 두 달이 넘는 동안 써나간 글을 나는 후딱 읽어버렸다. 그게 아쉽고도 미안해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전한 기분이었다.
몇 달만에 다시 꺼내 천천히 읽어가면서 아이의 생각과 느낌을 따라가 본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하던 생각은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찬다. 오랜만에 편지지를 꺼내어 아이에게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사두었던 우표를 붙이고 비 내리는 오후, 우체통을 향해 걷는다. 젖지 않고 아이 두 손에 닿게 되기를. 작은 기쁨이 되기를.
내면의 황금은 내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H에게 내 황금을 맡긴다. 우리가 함께할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된다.
H의 말대로 같이 우유니 사막에도 가고,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이야기도 하려면 나는 건강해야 되고 프랑스어 공부도 해야 한다.... 우리의 나이 차는 이십 년이 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