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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Apr 15. 2021

일주일만에 퍼진 중고차, 보험사·딜러와의 밀당 결과는

내 생애 가장 다이내믹했던 1박 2일

예기치 않게 산 차를 몰고 떠난 첫 출장에서 더더욱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했다. 양구읍 카페 주차장에서 고장 난 차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서울이나 춘천 같은 도시로 차를 가져가기보다는 양구에서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비록 보닛에서 채찍을 후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의외로 가벼운 정비로 끝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양구에도 폭스바겐 차가 수십대 수백 대는 될 테고, 그러면 차를 정비하는 카센터도 있지 않겠나 싶었다.


카페서 100m 거리에 공업사가 하나 있었다. 전화를 했더니만 “저희는 수입차 안 해요”란다. ‘아, 이래서 한국에서는, 한국인이라면, 한국 차를 타야 하는구나’ 하는 K-깨달음이 3연타로 몰려오던 차에 공업사 직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폭스바겐 성수동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던 직원이 근처 카센터에 있는데…”

출고 일주일 만에 처량한 신세가 된 골프. 비록 9살 먹은 헌 차이지만..

호재로다. 폭스바겐 출신 정비사가 양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소식인데 내가 사는 성수동 출신이라니 더 반가웠다. 그가 일하는 A 카센터까지 딱 1km. 자동차보험사에서 무상 제공하는 견인차를 불러 이동했다.

30대로 보이는 젊은 정비사였다. 보닛을 열어보더니 워터펌프가 완전히 나갔단다. 정확히는 워터펌프에 팬벨트가 물려 있는 풀리(Pulley, 도르래)가 부러졌단다. 멀쩡히 달리던 차의 워터펌프가 왜 고장 났는지 물었다. 그러니까 고장 날 법한, 고장 나기 일보 직전의 중고차를 사서 덤터기를 쓴 건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러나 원인은 알 수 없고, 매우 이례적인 고장이라고만 했다.


워터펌프와 팬벨트의 순정품 교체 비용은 공임을 포함해 약 100만원, 보다 저렴한 애프터 마켓 제품으로 하면 50만원 선이었다. 정비사는 굳이 정품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새 차면 몰라도, 10년 가까이 된 차니 더더욱. 아, 네.


관건은 수리비 중 얼마나 보상을 받느냐였다. 사자마자 고장 난 차의 수리비를 온전히 내가 떠안을 순 없었다. 다행히 2019년 6월부터 정부가 의무화한 중고차 보증보험이란 게 있었다. 구입 한 달 이내에 생긴 결함을 보장해주는 거다. 문제는 모든 고장을 보장해주지 않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워터펌프는 보장 부품이 아니라는 보험사 직원의 쌀쌀한 목소리만 확인했다. 대한민국 보험사가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마치 다 퍼주는 것 같지만 약관을 세세히 살피니, “~~에 한하여, ~~는 제외” 같은 문구가 한가득이었다.

멀쩡히 달리던 차의 워터펌프 풀리가 이렇게 댕강 부러진 걸 본 적이 있으신지.

이제 <비밀의 숲 2>의 우태하 검사를 닮은 중고차 딜러에게 연락할 차례. “당신, 어떻게 이런 식으로 고장 난 차를 팔 수 있어?”라고 북받친 감정을 쏟아붓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나는 문명인 아닌가. 최대한 차분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 여기는 강원도 양구다. 양구가 어딘지는 아실 테다. 거기서 차가 퍼졌다. 차 산 지 정확히 일주일만에. 당신이 정확히 200km 달린 다음에 고장 날 차를 팔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보험사에서는 보장을 안 해준단다. 당신이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는 거 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황망한 심정인지 당신도 알지 않겠나.


대략 이렇게 말했더니 딜러의 긴 한 숨이 이어졌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어요? 고객님이 원하시는 걸 말씀해 보세요.”


진흙탕 싸움을 할 의사는 없었기에 딜러가 끝까지 발뺌하면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리비 전액을 달라고 할까? 100만원짜리 정품으로 교환하고 전액을 달라고 하는 건 너무 과한 요구일까? 정신적 내상에 대한 보상과 서울까지 돌아갈 차비도 요구하는 게 맞지 않나?


고민하는 사이, 딜러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손님, 저희 코로나 때문에 요새 엄청 힘든 거 아시죠? 이번 주도 실적 미달이고, 고객님한테 판 차는 저한테 10만원도 안 떨어졌어요. 일주일에 몇 십만원 벌기도 어렵습니다, 요즘은. 후우.”

 

나라 잃은 백성 같은 한숨소리는 내 마음까지 끌어내렸다.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툭 나왔다.

“그럼, 20만원만 보태주세요.”

말을 하고 나도 놀랐다. 아니, 수리비 절반도 아니고, 30만원도 아니고 왜 하필 애매한 20만원인가? 딜러는 곧바로 알겠다며, 송금해주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거, 너무 쉽게 수긍하는 걸 보니, 내가 더 요구했어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게임의 패자가 된 것 같았다. 어쩌겠나, 엎어진 물인 걸. 보험사, 딜러와의 밀당을 끝내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차 수리를 위해 춘천이나 서울로 가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내가 양구로 오는 길이었다. 출장 일정을 마친 뒤 새 차(압니다, 헌 차라는 걸)를 타고 동해안으로 드라이브 여행을 떠날 참이었다. 양구 카센터 앞으로 온 아내에게 잔뜩 풀이 죽은 채 말했다. 우리 차 퍼졌다고, 차는 다음 주에나 고쳐진다니 저녁이나 먹고 서울 올라가자고.


그러게 차를 좀 더 신중하게 사지 그랬냐고, 딜러에게 더 요구했어야 했다고 타박할 줄 알았는데, 아내는 의외로 덤덤했다. 사실 아내는 차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가끔 주차장의 다른 차를 보고는 문 열어 달라고 노크를 하는 사람이다.


예약해둔 숙소가 환불이 안되니 그냥 렌터카를 빌려서 예정대로 동해안을 다녀오잔다. 마침 카센터 바로 앞에 L렌터카 사무실이 있었다. 알고 보니 견인차 아저씨가 렌터카도 운영하고 있었다. 역시 양구는 좁은 동네였다. 갑자기 양구라는 동네가 귀엽게 느껴졌다. 견인차 아저씨도 귀여운 인상이었다.


K3를 타고 우리는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해 잠을 청했다. 다음날은 그야말로 푸른 바다를 보며 멍 때리는 시간만 보냈다. ‘해멍’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 아야진해수욕장의 물빛은 태평양의 어느 해변이 부럽지 않을 만큼 눈부셨다. 푸른빛으로 찰랑이는 바다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강원도 고성의 바다. 중고차로 다친 쓰라린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풍경들.

차를 반납하기 위해 양구로 돌아온 길에 박수근미술관을 찾았다. 나무와 두 여인, 빨래터 같은 명작을 감상하고 화가의 가난했던 인생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작품도 좋았지만 미술관 자체가 무척 근사했다. 낮은 건물과 탁 트인 하늘, 신록으로 반짝이는 정원, 근사한 오솔길이 모두 작품 같았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박미화 작가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소녀의 조각이 있었는데 어제의 내 심정을 묘사한 것 같아서 한참을 바라봤다. 도쿄대 강상중 교수의 [구원의 미술관]에는 독일에서 뒤러의 자화상을 보고 존재의 심연에 가닿은 심정이 묘사돼 있는데 이 순간 내 마음이 그랬다. 저 소녀만큼은 중고차 호구의 마음을 알아줄 거야,라고 생각했다. 옆에 함께 엎드려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양구의 보물, 박수근미술관. 그리고 엎드린 소녀. 박미화 작가의 작품.


아내도 나도 박수근미술관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미술관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김밥을 사 먹고 버스를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돌아왔다. 내 생애 가장 다이내믹한 1박 2일이었다.


일주일 뒤,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양구로 가서 수리를 마친 골프를 찾아왔다. 그리고 약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 녀석과 함께 1만6000km를 무탈하고 행복하게 잘 달렸다. 채찍으로 맞은 듯한 아픈 기억도 많이 아물었다. 이 얼마나 맥 빠지는 엔딩인가. 어쨌거나 지금도 골프의 가속 페달을 밟을 때면 여전히 묘한 쾌감이 차오른다. 포르테(내 첫 차)는, 아반떼와 K3는 이 맛을 모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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