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카와 함께한 잊지 못할 양구 출장
2020년 6월, 꿈의 차를 몰고 첫 출장길에 나섰다. 목적지는 강원도 양구. 집에서 약 170km 거리, 깊은 산골, 휴전선 부근 민간인통제구역 안으로 가야 하는 길. 새 차(비록 9살 먹은 중고 신인이지만)의 성능을 시험하기에 딱 좋은 코스였다.
쭉 뻗은 고속도로가 많지 않아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진 못했지만, 아무도 없는 차에서 혼자 계속 같은 말을 내뱉었다. ‘역시 골프구먼, 역시 독일 차구먼.’ 기아 포르테를 몰면서 느껴보지 못한 묵직함, 그러니까 속도를 아무리 높여도 차가 붕 뜨지 않고 차분히 도로에 밀착되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안정감. 에어컨 소음이 심하고, 천장에 살짝 얼룩이 있었지만 중고차니까 큰 하자가 아닌 이상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들면 불편한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스티어링 휠에 오디오 조작 버튼이 없고(80년대 차입니까), 등받이 조절은 레버식(전동식은 기대도 안했다)이 아니라 다이얼식이어서 휴게소에서 좌석을 눕히고 잠이라도 잠깐 잘라치면 서른 번은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어쨌거나 편의장치보다 차 자체의 성능을 중시하는 독일 국민차의 특성이라니 수긍하기로 한다.
춘천을 지나 꼬불꼬불 지방도로를 달리는데 갑자기 계기판에 알 수 없는 신호가 떴다. 수도꼭지 모양의 노란색 경고등이었다. 불안했다. 차를 세워두고 폭스바겐 서비스센터에 연락했다. 상담원이 몇 가지를 확인했고, 큰 이상이 없다면 일단 주행을 계속한 뒤 가까운 시일 안에 점검을 받아보라고 했다. 찜찜했다. 하지만 차는 잘 움직였다. 다행히 양구에 잘 도착했다.
예약한 호텔은 양구서천 변에 자리한 KCP호텔. 야놀자에서 5만원도 안 주고 예약했는데 모텔이 아니라 번듯한 호텔이어서 놀랐다. 근데 KCP가 무슨 뜻인고 하니 Korea center point의 약자다. 언젠가부터 양구군은 한반도의 정중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토정중앙면(‘읍면동’ 할 때 그 면!!)’도 만들고 국토의 정중앙, 그러니까 사람 몸으로 치면 배꼽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양구 배꼽축제’라는 것도 만들었다. 당최 어떤 성격의 축제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국토 정중앙의 자긍심, 배꼽의 자존심은 모르겠고, 배꼽티를 입은 여인들이 물총을 쏘며 노는 사진이 많이 검색됐다. 김혼비, 박태하 작가가 쓴 [전국축제자랑]에 자주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K스러운 ‘막 갖다 붙이기’ 신공이다.
첫날 일정은 딱히 없었다. 혼자 동네 두부집에서 저녁을 먹고 한적한 천변을 산책하고 텅 빈 호텔에서 하룻밤 잘 묵었다. 호텔 주차장에는 내 차 한 대 뿐, 로비를 비롯한 모든 공간이 너무 썰렁해서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원래도 양구가 관광지는 아니지만 코로나 탓에 거의 영업을 접은 듯한 분위기였다.
본격적인 취재는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했다. 6⋅25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양구에는 펀치볼이라는 동네가 있다. 양구군 해안면을 일컫는다. 해안면 지형 전체가 마치 운석이 충돌해 푹 꺼진 듯하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도시 같달까. 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펀치볼, 우리말로 화채 그릇 모양 같다고 붙인 별칭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초여름, 펀치볼은 양구읍내보다 훨씬 한산했다. 날아다니는 벌레마저 따분해 보일 정도였다. 민통선 안쪽 마을인데다 펀치볼 둘레길을 걸으려면 사전 예약이 필요하고, 코로나 시국까지 겹쳐서 그러니까 썰렁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삼단 콤보로 작용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취재를 도와준 산림청 직원들과 반나절 동안 하이라이트 코스를 걸었다. 마을 어르신에게 전쟁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당시의 긴장감과 분단 상황의 엄중함을 강조해 기사를 썼다. 정작 길을 걸으며 인상적이었던 건 무구한 자연과 사발처럼 생긴 신기한 지형이었다. 마을 주민이 준비해준 숲밥도 잊지 못할 맛이었다. 펀치볼의 명물 시래기를 비롯해 머위·우산나물·두릅까지 17가지 찬을 맛봤다. 원래 나물만 보면 환장하는데(콩나물만 빼고), 평소 맛보기 힘든 귀한 산나물이 잔뜩 깔리니 걸신이 들린 듯 밥을 먹었다. 향긋한 숲이 통째로 몸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차를 몰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일을 잘 마쳤고 하늘은 쨍하고 길은 한산하고, 새 차(네, 압니다. 9년된 헌 차인 걸)를 모니 다시 기분이 잔뜩 고조됐다.
한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둑, 두둑. 양구읍으로 향하는 31번 국도에서 난데없이 뭔가로 차를 때리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도로에 있던 돌을 못 보고 밟았구나 생각했다. 몇 초 뒤, 또 소리가 났다. 둑, 두두둑. 분명 돌이 아니었다. 차 보닛에서 나는 소리였다. 불쾌한 타격음이 몇 번 더 들렸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내가 둔기로 얻어 맞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순간, 로마 병정에게 채찍을 맞던 예수님이 생각났다.
‘이건 무슨 일인지 몰라도, 분명 큰 일이군. 설마 차가 멈추거나 폭발하는 건 아니겠지.’
이어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중고차 잘못 산 호구가 바로 나였구나.’
진땀이 줄줄 흘렀다. 차가 멈추진 않았지만 계기판에 경고등이 여러 개 떴다. 냉각수 온도가 치솟았고 곧 에어컨이 꺼졌다. 다급하게 폭스바겐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당장 견인차를 불러 가까운 서비스센터로 가란다. “거기가 어딘데요?” “춘천이요.” “헐....(정말 육성으로 이 소리를 내뱉었다.)” 과연 양구는 강원도 산간벽지였다. 외제차 서비스센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춘천까지 갈 순 없었다. 양구에서 할 일이 남아 있기도 했거니와 정식 서비스센터로 가면 수리비 폭탄을 맞을 거란 불길한 예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에어컨이 안 나올 뿐 차가 멈추진 않았고 채찍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불안, 공포, 절망, 자괴에 휩싸인 채 20~30분을 조심조심 운행했다. 성석제의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는 교통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차가 강물에 빠지는 4.5초 동안 영화 필름처럼 인생을 돌아보는 내용이 나오는데 내가 그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지옥의 문을 열고 슬로비디오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양구읍에 무사히 도착했다. 사우나를 한 듯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산림청 직원을 만났다. 최대한 쿨한 척하며 차에 좀 문제가 생겼다고 얘기했다. ‘원래 이런 일, 누구나 겪잖아요?’라는 듯한 태도로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속이 편할 리 없었다. 망가진 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중고차 딜러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집에는 어떻게 갈지... 온갖 근심과 염려로 머리가 뒤엉켰다. (혹시 산림청 직원분들 그때 제 표정 연기 괜찮던가요?)
*눈물나는 호갱 스토리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아~